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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 정례회담은 항상 있었다?
기사 작성일 : 2023-03-16 17:00:03

구정모 기자 = 김기현 의원이 국민의힘 당 대표로 새로 선출된 뒤 지난 13일 신임 인사차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매달 두 차례 정기회동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정례회동 신설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정 소통 강화 방안으로 거론돼 왔는데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이에 앞서 김재원 전 의원은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후 지난 10일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와 인터뷰에서 "과거에도 여당이 되면 당 대표와 대통령과의 주례 회동 같은 것이 항상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의 말처럼 이런 양자 정례 회동은 과거에도 항상 있었던 것일까.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기념촬영하는 윤석열 대통령


안정원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신임 지도부 초청 만찬에서 김기현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대통령-당 대표 회동 정례화는 '3당 합당' 시절 YS 권력투쟁의 산물

이를 확인하기 위해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 관계가 어떤 변천을 겪어왔는지 살펴봤다.

민주화 이전엔 권력자가 집권하면 자신의 정당을 창설하면서 사실상 정당이 권력자에게 종속되는 구도가 되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굳이 따져볼 필요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례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사실상 국회의원을 직접 지명해 '유신정우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면서 의회 정치를 무력화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과거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 정례적인 만남은 큰 흐름에서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시작해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기에 사실상 중단됐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 일시적으로 부활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들어서며 다시 끊겼다.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정례회동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를 기점으로 그 성격에 변화를 겪는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까지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직했기에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정례 회동은 '당무보고'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후엔 '주례 회동', '정례 회동'이라고 칭해졌다.

당 총재는 당내 '1인자'로, 인사권과 공천권을 쥐고 있었고 정치자금도 좌지우지했다.

이런 맥락에서 당 지도부가 당 총재인 대통령에게 '당의 사무(당무)를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 당무보고는 주로 당 사무총장의 일이었고 간혹 당내 2인자인 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당 사무총장이든, 당 대표든 당무보고는 정례적인 일도 아니었다.

대통령과 당 대표 간 회동이 정례화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이 벌인 '권력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1월 소수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인 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합당 선언의 결과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한다.

그해 5월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 총재로 추대됐고, 김영삼·박태준·김종필 의원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김영삼 최고위원은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됐다.

민정·민주·공화계 등 계파별로 최고위원이 할당된 상황에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당내 2인자로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대통령과 정례회동을 요구했고, 그 결과 5월 22일 양측은 매주 1회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때는 수차례 만남이 이어졌지만 정례 회동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고, 그해 10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가 다시 한번 주 1회 회동을 갖기로 한 다음 그해 11월부터 실질적인 '주례회동'이 시작됐다.

당시 보도를 보면 김영삼 대표가 당내 민주계를 대표할 뿐 아니라 2인자로서 지분도 있었기에 주례회동은 당 대표가 보고하고 대통령이 지시하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한다. 둘의 주례회동은 '담판'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다양한 현안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는 평가다.

3당 합당 당시 김종필(왼쪽부터) 신민주공화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 자료 사진]

◇ YS·DJ 정부서도 당 대표가 대통령에 주례 당무보고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청와대로 들어간 후 자신이 민자당 2인자 시절 도입했던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주례회동을 이어갔다. 정권 초반 양측의 만남은 통상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배석자 없이 30분간 진행됐다.

단, 주례회동의 명칭이 '주례 당무보고'로 바뀌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도 청와대는 '주례 당무보고'라는 용어를 고집했지만 김영삼 당시 대표는 '주례회동'이란 표현을 썼고, 언론에서도 이 표현을 주로 쓰며 양자 간의 만남을 대등한 관계로 평가하는 경향이 컸다.

이 만남은 당 대표가 김종필 대표에서 이춘구 대표로 바뀌면서 '당무보고'의 성격이 더 짙어졌다.

김종필 대표는 3당 합당의 주역이었고 김영삼 대통령이 대권을 잡는 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례 당무보고'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김 대표가 '보고'만 한 것은 아니고 김 대통령과 여러 주제를 두고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종필 대표보다 정치적 체급이 낮았던 이춘구 대표 체제에선 보고 성격이 강화된 것이다.

김 대통령이 1997년 9월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회창 당 대표에게 총재직을 이양한 후 주례 당무보고는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더는 대통령이 당 총재가 아니므로 보고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주례 당무보고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뒤 재개됐다.

국민의 정부 시절 당무보고는 참석자가 확대됐다. 과거엔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2인자 간 단독회동의 형식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등 당 3역(役)도 참석했다. 당 대표가 먼저 대통령과 독대한 후 당 3역이 당무 전반에 관해 보고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주례 당무보고의 참석자는 1999년 7월엔 당 8역으로까지 확대됐다. 당 8역엔 기존 3역에 지방자치위원장, 홍보위원장, 연수원장, 대변인, 총재비서실장이 추가됐다.

이후 참석자는 당 대표와 당 4역으로 줄었다가 당 대표 단독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김 대통령이 2001년 11월 총재직에서 사퇴하면서 주례 당무보고는 다시 없어졌다.

이어 여당인 민주당이 같은 해 12월 총재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며 주례 당무보고의 부활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도 이듬해인 5월 당헌·당규를 개정, 총재직을 폐지하고 대선후보의 대표최고위원 겸직을 금지함에 따라 '제왕적 총재'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대권과 당권이 분리되면서 당무보고의 근거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

민주당 탈당 후 김대중 대통령


[ 자료사진]

◇ 대통령-당 대표 정례회동 참여정부 시절 사실상 없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참여정부 시절엔 대통령과 여당의 관계가 삐그덕대면서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정례적인 만남은 없다시피 했다.

여당인 민주당의 요구로 대통령과 당 대표, 당 3역이 참여하는 '당청 협의회'를 정례적으로 열기로 했으나 실제 만남은 몇 번을 이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지 불과 7개월 만인 2003년 9월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정례회동은커녕 양자 간 관계 자체가 단절됐다.

그해 11월 '정신적 여당'이라 할 열린우리당이 창당했고, 이듬해인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에 공식 입당하면서 당청 관계가 복원됐다.

하지만 그 관계는 이전 정권과 같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당정 분리' 원칙을 표방하며 당 대표와 정례적인 만남을 꺼렸다. 당정 협의는 필요하지만 주례회동과 같은 만남은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임했던 과거의 산물이라는 게 노 대통령의 인식이었다.

노 대통령이 새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새 소통 채널로 '정무관계 회의'를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정무관계 회의는 청와대 비서실장, 정책실장, 당 의장(대표), 원내대표, 대통령 정치특보 등이 참석하지만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불참하는 자리였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과의 면대면 정례회동을 요구했지만 노 대통령은 줄곧 불가 입장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급기야 '대통령이 당과 국회 운영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견지할 테니 당도 가급적 청와대 운영에 관해 불필요한 간섭을 최대한 자제해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당청은 이후로도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고 결국 노 대통령이 2007년 2월 탈당계를 내면서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갈라섰다.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 신고서


김주성 기자 = 28일 오전 열린우리당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정태호 정무 비서관을 통해 송영길 사무총장에게 제출한 열린우리당 탈당신고서.

◇ 이명박 정부선 일시 부활했지만 박근혜 정부 때부터 다시 중단

'탈(脫) 여의도 정치'를 선언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자 국회와 원활한 관계를 맺기 위해 여당 대표와 격주로 회동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과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2008년 4월에 처음으로 만난 뒤 강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그해 7월까지 5차례 회동하면서 얼추 격주 회동의 주기를 맞췄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후임 박희태 당 대표 간의 격주 회동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정과 사정으로 6주 만에 만남이 이뤄지거나, 1달 만에, 혹은 3달 만에 만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그 후임인 정몽준 당 대표와는 부정기적으로 만났다. 이어 안상수 당 대표와는 월 1회 얼굴을 보기로 했지만 양측의 정례 회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과 당 대표 간 정례회동은 없다시피 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선 정례회동의 명맥이 끊겼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대통령과 당 대표 간 회동의 정례화를 요구했으나 실제 정례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 정기적인 만남은 민주화 이후 7개 정부를 거치며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 등 3개 정부에서만 온전히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직하지 않는 시대에 들어선 후엔 이명박 정부에서 잠시 부활한 뒤 사라졌다가 윤석열 정부에서 다시 명맥을 잇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정례회동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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