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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에 맞서다]③ 허허'뻘'판, 보랏빛 물들더니 세계적 명소로
기사 작성일 : 2023-05-30 07:01:10

[※ 편집자 주 = 2010년대 중반 지역소멸론이 제기된 당시 79개이던 '소멸 위험' 지역은 올해 118곳으로 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절반을 넘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는 대도시까지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두가 암울한 현실만을 얘기하는 이때 온 힘으로 저출산과 초고령화에 맞서는 지자체들이 있습니다. 지자체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인구 유치에 발 벗고 나서는 그곳, '지방소멸에 맞서는' 그곳들이 있습니다. 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매주 1편씩 기획 기사를 송고합니다.]

버들마편초꽃 활짝 핀 퍼플섬


[신안군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신안= 정다움 기자 = "몇 년 전만 해도 여기는 뻘(갯벌)밖에 없는 허허'뻘'판이었제. 보랏빛으로 물든 지금이야 떠난 사람도 돌아오고 외지인도 찾고,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었제."

전남 신안군 안좌면 반월도에서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는 이정자(69) 씨는 갯벌을 가로질러 놓인 퍼플교와 마을의 보라색 지붕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보라색 립스틱으로 진하게 칠한 그녀의 입술은 마을 자랑을 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다만 눈동자는 그동안의 애환을 생각하며 촉촉이 젖은 듯했다.

반월도는 이팔청춘 나이에 시집을 온 그녀에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사람이 줄고 생기를 잃자 앞날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눈만 뜨면 갯벌에 나가 온종일 낙지를 잡고 김을 말리며 지냈던 46년. 그녀의 반월도 섬 생활은 어느 순간 '보랏빛 희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세계가 주목하는 '보랏빛 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보라색 립스틱 칠한 이순자 씨


[촬영 정다움]

◇ 소멸 위기 놓였던 섬, '보랏빛 희망'을 엿보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1천4개의 섬이 있어 '천사섬'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신안군. 그 특성을 살려 섬마다 특색을 달리한 '테마섬'을 꾸며보자는 생각이었다.

배 없이는 한발도 벗어날 수 없는 고립된 섬, 반월도와 박지도도 이에 동참했다. 76가구, 130여 명이 사는 작은 섬마을이 '소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도라지꽃, 꿀풀 등 보라색 꽃이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두 섬은 '퍼플'(PURPLE·보라색)을 테마로 잡았다.

봄날의 라벤더, 여름날의 버들마편초, 가을의 아스타 국화 등을 심어 보라색 꽃이 사시사철 필 수 있도록 했다. 자색 고구마, 자색 양파, 콜라비, 슈퍼 왕도라지 등 작물도 보라색을 골라 키웠다.

보랏빛으로 물든 퍼플섬


[촬영 정다움]

나무다리도 보라색으로 칠해 퍼플교를 탄생시켰다. 지붕과 창틀, 주민들이 사용하는 식기와 개집까지 모조리 보라색을 입혔다.

차량과 화물을 나르는 철제 선박과 어선, 철탑, 전신주까지 보랏빛으로 새로 단장하자 두 섬은 말 그대로 '보랏빛 천지'가 됐다.

그리고 그 효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 '보랏빛 귀향'…식당·펜션·카페에 동네가 들썩

"처음에는 오지 중의 오지인 반월도 생활을 반신반의했죠. 잘될지 두렵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반월도로 귀향한 장원삼(45) 씨는 3년 전 일을 떠올렸다.

보라보라 퍼플밥


[장원삼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에서 쭉 살았기에 섬 생활이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장씨의 눈에 신안군의 '색채 마케팅'이 들어왔다. "바로 이거야!" 마음을 다져먹은 그는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열었다.

그가 선보인 것은 집 바로 앞 바다에서 갓 잡아 온 싱싱한 생선과 보랏빛 색과 향을 입힌 '퍼플밥'.

비트와 국화꽃, 버섯, 치자 등 6가지 약재를 우려내 보랏빛을 입혔는데, 건강에도 좋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식당 일을 도와주던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하는 바람에 식당 문을 닫고 펜션 운영을 시작했지만, 퍼플밥의 인기는 여전하다.

그는 "주말에는 예약이 힘들 정도로 손님이 많은데, 펜션에서 해주는 퍼플밥을 무척 좋아한다"며 "힘들었던 서울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반월도에서 지내는 시간이 꿈만 같다"고 활짝 웃었다.

퍼플섬이 뜨면서 관광객이 밀려들다 보니 이처럼 외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귀향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퍼플섬으로 들어와 살고 싶다는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보라색으로 두른 장명성 씨


[장명성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장명성(50) 씨 부부도 퍼플섬을 가꾸는 일에 여념이 없다.

신안군관광협의회에 소속된 장씨는 섬마을 해변을 따라 운행하는 친환경 관광카트 운전기사로 일을 한다. 장씨의 옷과 카트 모두 보랏빛이다.

장씨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사람 사는 향기가 도는 마을이 됐다"며 "관광객들이 와서 퍼플섬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마을 청소 등을 자원해서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마을 곳곳에는 식당과 게스트하우스, 카페, 펜션 등이 세워졌다. 밀려드는 관광객에게 커피 등 간식을 판매하는 푸드트럭도 영업이 한창이다.

퍼플섬을 방문한 관광객 수는 2020년 20만3천명, 2021년 28만7천명, 지난해 38만5천명 등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관광객 수는 퍼플섬 인구(151명)의 2천500배가 넘는다.

관광객 김미리(49) 씨는 "말로만 듣던 퍼플섬에 직접 와보니 온 세상이 다 보랏빛으로 가득하다. 동화 속 판타지가 펼쳐진 것 같다"고 감탄했다.

이어 "부모님과 동생, 친척들과 함께 오고 싶다"며"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월도와 박지도를 잇는 퍼플교


[촬영 정다움]

◇ 한국 넘어 세계의 명소로…주민들 "이제부터 시작"

퍼플섬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2020년 신안군이 '퍼플섬'을 선포한 후 홍콩의 유명 잡지와 독일 최대 위성TV 등에 소개되더니, 이듬해 말에는 세계관광기구(UNWTO)의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에 선정됐다.

이는 관광으로 지역 불균형과 인구 감소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구촌 곳곳의 마을을 선정해 인증하는 사업이다. 퍼플섬은 당당히 전 세계 44개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세계 4대 패션쇼인 '파리 패션위크'에서 퍼플섬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상이 공개돼 다시 한번 전 세계에 퍼플섬의 이름을 알렸다.

퍼플섬의 이 같은 부상은 섬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키우고자 하는 주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마을 주민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도로변에 보라색 꽃을 심는다"며 "오랜 세월 꽃을 심다 보니 저쪽 섬에는 초입부터 라벤더 향으로 가득하다"고 박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박지도에는 5만여 평의 땅에 라벤더 등 100만 송이가 훨씬 넘는 보라색 꽃이 심어져 있다.

주민들이 조성한 퍼플섬의 라벤더 정원


[촬영 정다움]

이제 주민들은 "인구 소멸은 옛말이 됐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의욕을 불태운다.

퍼플섬이 있는 안좌면의 인구는 2015년 3천442명에서 2020년 2천988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퍼플섬'을 선포한 2020년 이후 증가세로 돌아서 최근 3천172명까지 늘었다.

신안군 14개 읍면 중 인구가 증가세를 보이는 곳은 안좌면이 유일하다.

주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퍼플섬의 명성을 더욱 키우기 위한 기민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2021년 말에는 방탄소년단(BTS) 뷔의 27번째 생일(12월 30일)을 앞두고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I PURPLE YOU' 문구를 활용한 대형 조형물과 현수막을 설치한 것이다.

뷔가 제시한 'I PURPLE YOU'(보라해)는 일곱 빛깔 무지개의 마지막 색이 보라색(PURPLE)인 만큼 상대방을 끝까지 믿고 사랑하자는 뜻이다.

세계적 인기를 끈 이 신조어를 활용한 대형 조형물은 퍼플섬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됐다.

지난해 5월에는 반월·박지도 할머니들이 BTS를 초대하는 내용의 영상을 찍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눈 덮인 방탄소년단 뷔의 퍼플섬 '보라해'


[독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주민들은 이색적인 공중전화기도 설치했다. 일명 '어린왕자가 운영하는 전화 하우스'이다.

별나라 어린왕자가 직접 운영하는 이 전화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힘내세요' 등 사랑의 메시지를 소중한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했다.

전화기 박스 안 동전함에서 100원을 꺼내 투입한 후 전화가 끝나면 자동으로 100원이 나온다. 이를 다시 동전함에 넣으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소소하고 따뜻한 아이디어를 계속 내놓고, 섬 곳곳의 명소를 아름답게 가꾸면서 주민들은 퍼플섬의 명성을 한층 키우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어선이 아니면 육지를 밟을 수도 없던 낙후된 섬에 보라색을 입히면서 국내외 관광객이 몰려들어 주민들은 물론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며 "퍼플섬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정착할 수 있도록 주민들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동기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은 "'관광 인구'를 적극적으로 유치해 인구소멸을 막은 신안군 퍼플섬은 지자체가 지방소멸에 대응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어린왕자가 운영하는 퍼플섬 전화 하우스


[독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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