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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앤 무비] ①한 줌 재가 된 불법체류 부부와 '레이닝 스톤'
기사 작성일 : 2023-03-12 08:00:35

[※ 편집자 주 = 영상이 문자를 압도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는 OTT( 온라인동영상 서비스) 시대에 발맞춰 전북지역 현안과 사건·사고를 톺아보고 이를 영화, 문헌과 접목해 인문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기사를 2주에 한 번씩 10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칸영화제서 인터뷰하는 켄 로치 감독


[ 자료사진]

(전주= 김동철 기자 = "그날은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야."

잘 나가던 영국 경제가 기울었고 이 집 가세도 휘청인다.

실업률이 극한에 달한 영국 맨체스터의 한적한 마을. 실직자 밥(브루스 존스)은 딸 콜린과 아내를 위해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찾아 나선다.

훔친 양을 도축해 팔고 남의 집 하수구를 뚫기도 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막힌 하수구를 뚫다가 온몸에 '똥칠'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인간 존엄성 상실과 밥벌이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와중에 낡은 초록색 밴마저 도둑맞는다. 도통 되는 일이 없는 밥이다.

강한 자존심만큼 한없는 가족애를 지닌 가장으로서 밥은 늘 고군분투한다.

밥은 딸 콜린의 성찬식(예수의 수난을 기념하는 기독교 의식)을 맞아 새 드레스를 마련해주려고 동분서주한다.

아내는 꼭 새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며 드레스를 빌릴 수도 있다고 설득하지만, 밥은 영 마뜩잖다.

없는 살림이지만 딸에게만큼은 예쁜 드레스를 사주고 싶어서다.

딸의 새 드레스는 밥의 자존심과 동의어로 읽힌다.

결국 대출회사에서 돈을 빌렸다. 대출회사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넘긴다.

밥의 집에 들이닥친 고리대금업자는 밥의 아내를 겁박한다.

뒤늦게 이 소식을 알고 분노한 밥은 술집에서 나오는 고리대금업자를 렌치로 공격했고, 그를 피해 차를 타고 도망치던 고리대금업자는 주차장 기둥을 들이받고 허망하게 숨진다.

겁에 질려 성당 신부에게 달려간 밥.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 고리대금업자의 채무 장부를 불에 태우고 밥이 경찰에 자수하지 않도록 종용한다.

켄 로치에 대한 작가론을 쓴 법학자 박홍규는 "주인공의 선함을 믿고 증거를 없애줌으로써 자신의 어린 양에게 진정한 평화를 안겨주는 반전 캐릭터 신부를 통해 우리는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밥의 가족은 행복한 성찬식을 치르고 밥의 집에 찾아온 경찰은 도둑맞은 밴을 찾아주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영국 영화 '레이닝 스톤(Raining Stones)'은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1993년 작품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대처리즘을 비판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레이닝 스톤'이란 마치 하늘에서 돌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핍진한 현실을 비유한 말이다.

제목이 은유하듯 주인공 밥과 주변인들은 비처럼 돌이 쏟아지는 것 같은 빈곤과 빚에 허덕인다.

이들은 하나같이 실직, 궁핍, 좀도둑, 생계형 대출 등의 초라한 이미지로 덧칠됐다.

1993년의 영국 사회는 2023년 한국 현실과 오버랩된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30년 후 한국 땅에선 이방인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태국인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된 고창군 주택


[ 자료사진]

지난달 전북 고창군에서 불법체류 중인 태국인 부부가 추위를 피하려고 냉골 방에서 장작불을 피웠다가 질식사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0여 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고창군에 정착한 태국인 부부.

우여곡절 끝에 불법체류자가 된 이들은 논밭일 등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품삯을 받아왔다. 이렇게 모은 돈 대부분을 고향의 가족에게 보냈다고 한다.

부부는 매우 낡은 집에 연간 30만원에 세 들어 살았다. 월 30만원이 아닌 '연간 30'이다. 짐작이 가는 열악한 주거 환경이다.

강추위가 이어지자 부부는 집 바로 옆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씻을 때만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부부는 밀폐된 방안에 불을 피웠다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질식사했다.

이들이 숨진 날로 추정되는 지난달 22일 고창군의 최저기온은 도였고, 시신으로 발견된 23일 최저기온은 도였다. 결국 부부는 한 줌의 재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의 비극이 알려지자 혹자는 "우리가 불법체류자까지 보호해야 하느냐"고 볼멘소리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이제 불편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때다. 불법체류자는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상 속 깊숙이 들어온 지 오래다.

쫓아내려고만 할 게 아니라 순기능을 찾아야 한다. 불법체류자들이 우리 사회와 노동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고 강제퇴거 사유 축소와 방문취업제 확대로 이들을 제도권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반 다문화 정서를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한 시점이다.

켄 로치는 목수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런 소감을 남겼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신자유주의에 의해 추동된 긴축정책이라는 위험한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수백만 명에게는 삶이 곧 투쟁이 되어버린 심각한 생활고를, 아주 극소수의 누군가에는 기괴할 정도의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다. 세계 영화의 역사에는 여러 전통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중요한 전통은 세상을 향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영화, 거대한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 전통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불편한 현실을 스크린에 담아낸 블루칼라의 시인다운 말이다. 밥과 다니엘의 영혼을 더럽혔던 궁핍은 여전히 도처에 깔려 있다. 삶이 투쟁이 되어버린 시대에 '레이닝 스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참고 영화 및 문헌 : 켄 로치 '나, 다이엘 블레이크', 박홍규 '비주류의 이의신청', 주성철 '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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