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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백제가 남긴 세계문화유산
기사 작성일 : 2023-03-15 09:01:18

(공주= 현경숙 기자 = 충청남도 공주시는 세계유산도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세 곳이나 있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피장자의 신분이 확실하게 밝혀진 무령왕릉, 한국의 7대 산지승원인 마곡사, 대표적 고대 성곽인 공산성이 그곳들이다. 인류 유산으로 자리 잡은 백제의 자취이다.


무열왕릉과 백제 고분이 모여 있는 왕릉원[사진/조보희 기자]

◇ 봄을 기다리는 백제 유산

1천500여 년 전의 유적, 유물들에는 아름답고, 장엄하고, 뜨겁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오랜 세월 속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백제사 연구에 전환점을 제공한 무령왕릉은 자료가 별로 없어 아직 베일에 싸여 있는 백제 역사를 규명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1971년 우연히 발견돼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했던 무령왕릉은 발굴된 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이곳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들은 백제의 용맹스러웠던 역사와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찬란한 봄날을 여는 열쇠들이다.

5월이면 신록 축제를 열 정도로 신록이 어여쁜 마곡사에는 벌써 봄기운이 돌고 있다.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산성에는 돌과 흙으로 된 성벽 위에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일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어느 계절에 방문해도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공원 같은 곳이다. 공산성은 탐방객들이 행복과 웃음의 꽃을 피우며, 자신이 간직한 뜨거운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주길 기다리고 있다.

◇ 백제의 숨결을 되찾아준 무령왕릉

백제사는 수수께끼 같다. 그만큼 밝혀진 게 적다. 오래된 유물들은 대개 무덤에서 발굴된다. 백제 무덤은 도굴이 쉬운 구조여서 새 무덤이 발견되더라도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록도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유실됐다. 그런 백제사에 숨결을 불어 넣어 준 사건이 무령왕릉 발굴이다.

고대 무덤 배수로 공사 도중 발굴된 무령왕릉은 약 1천5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무령왕릉은 훼손되지 않아 능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 내부구조, 부장 유물이 온전하게 확인된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이다.

무령왕릉은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줬다. 백제와 중국·일본과의 교류 사실도 확인됐다. 내부 벽체를 벽돌로 쌓아 만든 무령왕릉은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았다. 왕과 왕비의 관은 습기에 강한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무덤 주인의 신분이 적힌 묘지석, 능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 등 무령왕릉에서만 발견된 특이 유물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금제관장식, 금제귀걸이 등의 금속 공예품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의 미의식, 창의성, 수준 높은 공예 기술, 백제인의 장인 정신을 엿보게 한다.


무열왕릉을 지키던 진묘수[사진/조보희 기자]

◇ 위대한 발견·졸속 발굴

무령왕릉은 어둠에 갇혀 있던 백제문화의 정수를 눈부시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20세기 한국 고고학사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발굴 과정은 어이없을 만큼 졸속이었다.

장맛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1971년 7월, 송산리 고분군(현재 명칭: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에 있는 6호 고분 배수로 공사를 하던 도중 무령왕릉은 발견됐다.

뉴스를 듣고 들이닥친 지역 주민들과 취재진으로 빚어진 북새통 속에서 유물 수습은 단 17시간 만에 끝났다.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체계적이고, 신중하게 진행됐어야 할 발굴 작업이 이삿짐 옮기기보다 못하게 후다닥 해치워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유물이 짓밟히고 고고학적 실마리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 한국의 문화재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무령왕릉 유물을 보고 싶다며 몇 점 청와대로 가져오게 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출토된 왕비 팔찌를 두 손으로 쥐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휘었다 폈다 했다. 이를 지켜보던 김원룡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팔찌가 부러질까 조마조마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김 당시 관장은 한국 고고학의 개척자이자 무령왕릉 발굴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가 졸속 발굴에 대해 왕릉을 발견한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다. 고고학도로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두고두고 괴로워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서 얻은 쓰라린 교훈은 2년 뒤 훨씬 차분하게 진행된 신라 천마총 발굴의 밑거름이 된다.

발굴 초기에 3천 점이 채 못된 유물의 수는 50여 년이 지난 현재 5천 점 이상으로 늘었다. 출토물에 대한 연구 조사 결과 개별 유물로 분류, 확정된 것이 증가한 것이다. 연구는 현재 진행형이다. 연구가 진척될수록 백제 역사와 문화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무열왕 금제관식[사진/조보희 기자]

◇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령왕

왕릉 발견과 발굴이 워낙 극적이다 보니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한 감이 있다. 무령왕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지금의 서울)을 빼앗기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후 4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462년 태어나 40세에 동성왕의 뒤를 이었다. 즉위 6년에 대흉년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구휼 정책을 폈다. 즉위 10년에는 제방을 수리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귀농시켜 농업 기반을 다지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다. 중국 남조에서 수입된 유학과 도교 사상을 일본에 전파했다.

무령왕의 대외 정책 중 가장 큰 특징은 고구려에 대한 공세였다. 한성을 함락당한 백제는 무령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를 다시 공격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무령왕은 즉위 21년에 다시금 강국이 됐다는 의미에서 '갱위강국'(更爲强國)을 선언했다. 이에 중국은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공인했다.

무령왕은 웅진 도읍 시기에 재위했던 5명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고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 대의 부흥은 무령왕 대에 그 기초가 다져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무령왕릉에는 패배와 좌절을 용기로 극복한, 뜨거운 이야기가 근저에 흐르고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모셨던 목관[사진/조보희 기자]

◇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말이 회자할 정도로 봄이 아름다운 마곡사는 100여 사찰과 암자를 관할하는, 충남 불교 대본산의 하나이다. 백제 무왕 41년인 640년에 선종 사원으로 창건됐다. 마곡사는 절의 본당인 금당이 두 곳이나 된다. 대웅보전과 대광보전이다. 그만큼 큰 절이다.

대웅보전은 현존하는 한국 전통 목조건축물 중에는 많지 않은 중층 건물이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한 개 층으로 돼 천장이 높다. 목조 건물의 아름다운 건축미가 잘 표현돼 있다. 마곡사는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한국의 산사 혹은 산지승원으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들 7개 사찰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신앙, 수행, 일상생활의 공간으로서 한국 불교의 역사적 발전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이다.

대광보전 앞에 있는 5층 석탑은 고려 말기에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 탑 머리에 있는 청동 장식인 풍마동(風磨銅)은 전 세계에 3개만 존재하는 희귀 문화재이다. 마곡사 풍마동은 3개 중 가장 오래됐다.


마곡사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사진/조보희 기자]

마곡사에도 가슴 적시는 이야기가 흐른다. 마곡사 내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산전은 조선 시대 세조 임금이 만세가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매월당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 세조는 마곡사에 은둔한 매월당을 찾아왔으나 그는 자리를 피해 버린다. 세조는 '매월당이 나를 버리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며 타고 온 가마를 마곡사에 두고 갔다. 세조의 가마는 지금도 마곡사에 보관돼 있다. 영산전 편액은 세조가 직접 쓴 것으로 전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후 수감됐다가 탈옥해 마곡사에 숨어 지냈다. 광복 후 마곡사를 다시 방문한 선생은 대광보전의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 돌아와 세상을 보니 마치 꿈속 일만 같구나)라는 주련을 보고 감회에 젖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백범당 앞에는 선생이 심은 향나무와 친필 휘호가 있다.

마곡사에는 또 다른 유명인사의 휘호가 있다. 범종루 옆에 있는 동정각(動靜閣) 편액은 운보 김기창이 쓴 것이다.


마곡사 대웅보전 외부 모습[사진/조보희 기자]

◇ 비단같이 고운 금강을 굽어보는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지은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며, 해발 110m인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이다. 성벽 전체의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 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630년 백제 무왕이 사비(현재의 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백제 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거처했다. 조선 시대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신했던 요충지이기도 하다.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사진/조보희 기자]

백제의 추정 왕궁터, 석빙고, 4곳의 성문, 쌍수정 등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다. 공산성 공북루는 '비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다운' 금강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현재 공산성에서는 왕궁 추정지 발굴 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천500년의 세월을 간직한 공산성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것인가.

※ 이 기사는 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3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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