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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이 수십개…인천 일제 강제동원 흔적 탐방 재개 추진
기사 작성일 : 2023-03-22 11:00:35
부평 지하호 입구


[촬영 김상연]

(인천= 김상연 기자 = "이곳은 1945년 광복 이후 그대로 시간이 멈춰 있습니다."

인천시 부평구 함봉산 산책로를 따라 10여분간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땅굴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부평 지하호'로 불리는 땅굴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유적으로 현재 4개 구역 23곳으로 분류된다.

는 지난 21일 부평문화원의 협조를 받아 부평구 일대 지하호 23개 중 입장이 허용된 C구역 6번 지하호를 방문했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곳 지하호는 짙은 어둠 속에 강제 동원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손전등에 의지한 채 150m가량을 이동하는 동안 벽면 곳곳에는 쇠붙이로 구멍을 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하호 천정에서는 측량 용도로 박아둔 나무토막들과 지하수에 녹은 석회 성분이 고드름처럼 맺힌 종유관의 모습도 보였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인 전진수(93)씨는 1945년 중학생 신분으로 끌려와 하루 2교대로 작업하며 굴을 팠다고 했다.

전씨를 비롯한 각지의 학생들은 폭약을 설치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계속 암반을 뚫고 돌덩이를 바깥으로 빼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눈에 봐도 널찍한 지하호는 국내 최대 일본군 무기공장인 조병창을 지하화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강제 동원이 이뤄졌음을 짐작게 했다.

부평 지하호 내부


[촬영 김상연]

실제로 인천육군조병창 '1945년 상황보고' 문서에 따르면 일제는 당시 소총과 실탄 생산 공장 등을 지하 시설로 이전하려고 했다.

계획상으로는 지하 공장 5천710㎡, 반지하 공장 4천380㎡, 지상 설비 5천22㎡ 규모로 총면적 1만5천112㎡에 달했다.

김규혁 부평문화원 기획팀장은 "식민지 조선인들은 해방 직전까지 어두컴컴한 땅속에서 작업을 이어갔다"며 "지하 공사 요원으로 5천명이 동원됐고 대부분 학생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대대적인 무기공장 지하화를 통해 적 공격에 대비하려던 계획은 일제 패망과 함께 중단됐고 부평 지하호는 미완의 땅굴로 남겨졌다.

해방 이후에는 부평구 일대에 미군이 주둔함에 따라 조병창이 남긴 침략전쟁의 흔적은 서서히 희미해졌으며 지하호도 잊혔다.

그러다가 2016년부터 부평문화원의 학술 조사와 발굴 작업 등을 통해 지하호의 역사적 의미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지하호는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돼 있지만, 한 곳에 대규모 지하호가 밀집한 것은 함봉산 일대가 유일한 것으로 조사됐다.

애초 부평구에서는 지하호 27개가 발견됐으나, 2019년 도시 개발로 인해 4개는 소실돼 23개가 남아있는 상태다.

부평 지하호 내 작업 흔적


[촬영 김상연]

조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인천육군조병창 조사보고서'를 통해 "부평 지하호는 일제의 '본토결전' 수행을 위한 핵심 시설로 침략전쟁의 피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제 군사시설의 용도와 역할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으면 그 유적의 중요성을 시민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역사성을 밝히기 위한 학술 연구가 지속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부평문화원은 부평 지하호 관련 조사와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는 한편 지하호 가상현실(VR) 콘텐츠를 개발하는 등 강제 동원 역사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오는 4월부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축소한 탐방 프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재개한다.

부평문화원은 올해 모두 40회에 걸쳐 지하호 탐방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으며, 조만간 홈페이지 공지 이후 매회 선착순으로 참여자 20명을 모집할 예정이다.

신동욱 부평문화원 원장은 22일 "역사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아픈 역사의 생생한 현장을 부평 지하호에서 느낄 수 있다"며 "조병창과 지하호를 연계해 역사 교육의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평 지하호에서 발견된 종유관


[촬영 김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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