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카이로= 김상훈 특파원 = 이슬람 금식성월을 맞은 중동 국가 레바논에서 종파 간 이견으로 일광절약시간제(서머타임) 도입을 앞두고 2개의 시간대가 혼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로이터 통신 등 외신이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수니파 무슬림인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임시 총리는 다음 달 20일부터 올해 서머타임 적용을 시작하기로 지난 23일(현지시간) 결정했다.

그동안 레바논에서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통상 3월 마지막 주말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해왔다.

이런 관행을 깬 미카티 총리는 이번 결정의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현지 언론에 보도된 미카티 총리와 나비 베리 국회의장의 대화 영상을 보면, 이슬람 금식성월을 맞은 이슬람교도의 편의를 위한 배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아파 무슬림인 베리 의장은 "라마단이 끝날 때까지 (서머타임 적용으로) 오전 7시가 되는 시간을 6시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상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고통스런 금식을 하고 해가지면 금식을 깨는데, 서머타임 적용을 하지 않으면 금식을 깨는 시간이 저녁 7시께가 아닌 6시께로 한 시간 빨라진다.

이슬람교 관련 기관들과 정당들은 미카티 총리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마론파 기독교계는 미카티 총리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24일 밤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하기로 했다.

마론파 교회 측은 "(라마단 기간을 서머타임에서 제외하는 조치에 대한) 사전 협의가 없었다. 이 조치는 국제 기준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시민들과 산업 현장 근로자들도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일부 기업들과 최대 뉴스 채널인 LBCI, MTV 등 언론 매체들은 주말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하고 있다.

반면 레바논 항공사인 미들이스트에어라인은 근무시간 등에 겨울 시간대를 유지하되 비행 스케줄은 국제 기준에 맞추기로 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영 통신사는 휴대전화 등 기기의 시간 표시에 서머타임이 자동 적용된 경우 수동으로 시간을 맞추라는 안내 메시지를 고객들에게 발송했다.

무소속 의원인 와다흐 사데크는 트위터에 "(정부의 결정은) 그들이 얼마나 큰 혼란을 유발할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수도 베이루트 시내 카페 등에서는 서로 간에 기독교 시간에 따라 생활할지 무슬림의 시간에 맞춰 생활할지를 묻는 시민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장기 내전을 치른 레바논은 이후 종파간 세력 균형을 위한 합의에 따라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 독특한 권력분점 체재를 유지해왔다.

이런 종파 간 권력분점 시스템은 정치권 및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낳았고 결국 중동에서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인 레바논을 위기로 몰아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19년 본격화한 레바논의 경제 위기는 코로나19 대유행, 2020년 베이루트 대폭발,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겪으면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가운데 지도자 선출에도 종파간 합의가 필수여서,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 이후 임시 총리 체재가 유지됐고, 지난해 10월 이후론 대통령도 공석인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