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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멍·∼멍·∼멍'…멍때리기 신드롬
기사 작성일 : 2023-05-22 16:00:36
딱히 뭐 할 거 없는 대회…'멍만 때리면'


김주성 기자 = 21일 오후 서울 잠수교에서 열린 2023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멍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황재훈 논설위원 = 불을 피워놓고 멍하니 불을 바라보는 '불멍', 아무 생각없이 강가나 바닷가에서 물을 바라보는 '물멍', 숲을 보는 '숲멍', 바람을 즐기는 '바람멍'…. 요즘엔 '논멍', '밭멍' 등 어떤 대상 뒤에다가 '멍'을 붙여 생겨난 신조어들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 한강 잠수교 인근에서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지난 21일 열렸다. 올해로 6회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뒤처지거나 무가치하다는 현대사회 통념을 깨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행사다. 일정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장 안정적인 심박수를 유지한 참가자를 선발한다. 참가자별 심박수를 측정하고 시민 투표와 합산한 결과를 산정해 최종 우승자를 선정한다. 올해 행사도 참가 신청 경쟁률이 45대 1에 달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서울에서만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이달 말에는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도 열린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재작년에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멍때리기 대회를 소개하기도 했다.


2022년 10월 선정릉에서 열린 조선왕릉문화제에서 아로마 안대를 착용하고 해먹에 누워 휴식하는 '숲멍향멍' 프로그램을 시민들이 체험하는 모습 [ 자료사진]

표준국어대사전은 '멍하다'에 대해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극에 대한 반응이 없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잡념을 잊고 멍하게 보내는 것이 그저 무의미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멍때리기를 두고 "뇌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지루함은 창의성을 자극하는 가장 효과적인 뮤즈",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더욱 효율적인 아이디어와 생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멍때리는 시간, 비집중 모드가 필요하다"는 등 다양한 얘기를 담은 관련 서적들이 나오기도 했다.


[ 자료사진]

지난해 10월 데이터센터 화재로 '국민 대표 메신저'인 카카오톡이 장시간 먹통 되자 여기저기서 불편하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히려 편하다",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것 같다", "주말에도 온종일 업무 카톡에 얽매였는데, 불필요한 카톡으로부터 단절되니 너무 개운하다", "불필요한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돼서 편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반강제로나마 국민 상당수가 '디지털 디톡스'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느꼈을지 모른다.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는 디지털과 해독이 결합한 말로 디지털 기기의 중독과 피로감에서 벗어나 심신을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

얼굴이 잘 알려진 한 탤런트가 몇해 전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누군지 잘 알아봐서 불편한 일은 없어요. 지하철을 타더라도 다들 고개 숙여 휴대폰만 보고 있으니 앞에 제가 서 있더라도 누가 있는지 모르더라고요." 지하철 속 풍경을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잠시라도 멍때릴 수 있는 틈에도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저녁에 한 자리 모인 가족들 간에는 대화가 더 없어졌다. 잠시의 여유도 허락지 않고, IT 기기가 우리 속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다.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 속에 파묻혀 살며 휴대전화가 없으면 초조해하고 불안감을 느끼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 보고서는 한국을 두고 명문대에 진학하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커리어를 확보하기 위한 '황금 티켓 신드롬'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쩌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생존하고 황금티켓을 잡기 위해 우리는 더욱 자신을 초연결사회의 촘촘한 거미줄에 연결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 주말은 잠시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발적인 디지털 디톡스 체험에 뛰어들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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