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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피란 1년] ① 전쟁통에 찾은 고국…사선 넘으니 생활고
기사 작성일 : 2023-05-24 09:00:34

[※편집자 주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이하 우크라) 침공을 피해 국내로 이주한 고려인 동포들이 최근 한 해 동안 크게 늘었습니다. 는 고국을 찾은 우크라 출신 고려인 동포들을 밀착 취재해 '우크라 전쟁 1년'이 이들의 삶에 준 변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쟁 피란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에 편입된 동포들이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개선 여지는 없는지 등을 5차례 기사를 통해 전합니다.]

인터뷰하는 우크라 출신 고려인 동포


(안산= 양정우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 동포 정 이고르 씨(오른쪽)가 이달 17일 경기 안산 단원구 선부동의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서 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고향을 떠나지 못한 가족의 신변 위험을 우려해 얼굴 공개를 꺼렸다.

(서울·안산= 양정우 기자 =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약 800만명의 우크라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전쟁 위협을 피해 고국으로 이주한 고려인 동포수도 급증한 것으로 파악됐다.

24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우크라 전쟁 개전 초기인 2022년 3월 기준 국내 체류 우크라 출신 고려인은 2천481명이었으나, 13개월 만인 올해 4월에는 약 1천명(40%)이 증가한 3천475명이었다.

이처럼 단기간에 고려인 동포들이 국내로 집단 이주한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들과 함께 국내로 입국한 우크라 국적의 친지까지 포함하면 우크라 전쟁 여파로 한국으로 이주한 전쟁 피란민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인 동포들이 찾은 한국은 말만 고국일 뿐 사실상 낯선 타지나 다름없다.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불가한 데다 합법적인 취업 길은 좁고, 거주나 의료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가족과 함께 사선을 넘어 어렵게 고국의 품을 찾았지만, 생활고를 겪으며 신음이 다시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입국 받아줘 감사하지만…" 생계는 '막막'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는 작년 10월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 고려인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안산 고려인 정착촌 '땟골' 모습


(안산= 양정우 기자 = 이달 17일 찾은 경기 안산 단원구 선부동의 고려인 정착촌 '땟골' 풍경.

우크라이나 현지 피란 고려인 100명, 국내 입국 피란 고려인 242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첫 실태조사에서 우크라 현지 피란 고려인들은 가장 필요한 지원으로 '식료품·생활용품'을 꼽았다. 피란지 속 이들의 궁박한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반해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이들은 재정 지원 외에 의료와 숙박 지원, 심리 정서적 지원, 자녀 교육 등 일상과 밀접한 도움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실태조사와 함께 국내 피란 고려인 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인터뷰에서는 이들이 입국 후 겪었던 어려움과 개선 목소리가 한층 두드러졌다.

인터뷰를 분석한 보고서에는 "한국 정부는 우크라 고려인에게 입국 비자를 주지만 생계유지는 오로지 각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고려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나 한계에 직면했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친척·친구에게 돈을 빌리면서 입국 초기부터 빚을 지고 있다" 등의 토로가 담겼다.

입국 이후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나 여의치 않다는 목소리도 컸다.

"우크라 고려인들은 3개월이 지나야 취업비자가 나오기에 입국 후 바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불법을 알고도 생계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한국에 와도 취업을 할 수가 없어 더 힘들다" 등의 호소다.

고려인 동포들은 부족한 의료지원과 한국어 교육에 대한 아쉬움도 털어놨다.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수업


(안산= 최근 경기 안산의 동산교회에서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수업이 열리고 있다. [김종홍 선교사 제공]

국내 입국한 외국인의 경우 6개월이 지나야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합법적인 취업이 아닌 이상 6개월이 지나면 건강보험 지역 가입이 이뤄지는데 가입이 되더라도 피부양자 범위가 본인·배우자·미성년자 자녀로 제한되다 보니 같은 가족 구성원이더라도 보험 혜택을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너머 서울상담소의 김준태 소장은 "고려인 대부분이 비공식적으로 일하다 보니 직장 가입을 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지역 가입을 하더라도 1인당 월평균 14만원에 달하는 보험비를 내야 하다 보니 부담이 매우 크다"고 전했다.

한국어 교육의 경우 법무부가 외국 국적 이주민의 한국 사회 정착을 위해 운영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 등이 있으나 고국에서마저 생계 전쟁에 내몰린 고려인들이 교육과정에 온전히 참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 "'전쟁 난민'으로 인식 전환을"…지원·교육 병행 목소리

지난달 기준 국내 체류 우크라 출신 고려인 동포(3천475명)의 비자 유형을 보면 재외동포(F-4)가 1천864명, 방문취업(H-2) 883명, 방문동거(F-1) 689명 등이다.

정부는 개전 이후 우크라 고려인 동포 입국이 늘자 F-4, F-1 비자 등을 소지한 이들의 취업활동 제한범위를 완화했으나 구직이 어렵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H-2 비자로 입국한 경우도 취업을 위해 사전 교육을 받고, 사용자와 고용계약서를 맺기까지 절차가 까다로운 탓에 상대적으로 일자리 구하기가 쉬운 불법 취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의 김영숙 이사


(안산= 양정우 기자 = 이달 17일 경기 안산 단원구 선부동에 있는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서 이 단체의 김영숙 이사가 국내 고려인 동포 체류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김준태 소장은 "방문취업(H-2) 비자로 온 동포의 배우자는 방문동거(F-1) 비자를 받고 오는 일이 많지만, 이들은 인구소멸 지역에서나 취업활동이 가능하다"며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맞다"고 했다.

우크라 전쟁 이후 고려인 동포 입국과 지원활동을 펴온 김종홍 선교사도 "(고려인들은) 직접적인 생계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도록 조금 더 기준을 낮춰달라는 것"이라며 "일을 하게 해주면 고국에서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 고려인 동포의 경우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려 고국 이주를 택한 만큼 이들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며 흡수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서 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100만명이 넘는 우크라 난민을 받은 독일의 경우 난민들이 수용시설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도록 하며 생계비를 보조하는 대신 6개월 후에는 현지 언어 시험에 통과해야만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현지 사회 적응을 유도하고 있다.

너머의 심층 인터뷰에 참여했던 고려인 동포들도 이같은 정착 중심의 정책 방향에 공감을 나타냈다.

인터뷰 분석 보고서에서 동포들은 "한국 정부가 장기적으로 한국어 교육 및 취업교육 등을 마련해 (고려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자리 모인 고려인 동포 학생들과 김종홍 선교사(오른쪽)


[김종홍 선교사 제공]

김종홍 선교사는 "독일처럼 난민 정책을 펴면 초기 예산이 많이 들어가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미래 사회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크라 고려인들도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지원받고 언어를 배워가면 체계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없다 보니, 우리 같은 민간에서 주먹구구로 지원하는 실정"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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