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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화순탄광] ① "막장? 내겐 희망이었다"…광부의 '검은 눈물'
기사 작성일 : 2023-06-05 08:01:10

[※ 편집자 주 = 118년을 이어온 전남 화순탄광이 오는 30일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시대환경 변화에 따른 예견된 일이라지만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못내 아쉬운 순간이기도 합니다. 는 폐광을 앞둔 화순탄광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는 4편의 기사를 송고합니다.]

소회 밝히는 화순광업소 광부 김용승 씨


(광주= 천정인 기자 = 지난달 26일 전남 화순군 동면 화순광업소노동조합 사무실 앞에서 광부 김용승(48) 씨가 소회를 밝히고 있다.

(화순= 정회성 천정인 기자 = "남들은 막장이라고 하는데 우리 인생에는 희망이었습니다, 희망. 이 일을 해서 가족과 행복하게 먹고살았고, 아이들도 가르쳤으니까요."

전남 화순에서 2대째 광부로 일하는 김용승(48) 씨는 삶과 생계를 꾸리게 해줬던 탄광의 폐업을 한 달여 앞둔 5일 회한의 세월을 떠올렸다.

1905년 문을 연 화순탄광은 일제 식민지와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등 격동의 역사를 거쳐 이달 말 문을 닫는다.

김씨는 31살이었던 2006년부터 이곳에서 광부로 일했다.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담에 빠진 김씨를 탄광은 조건 없이 품어줬다.

그의 아버지, 작은아버지, 매제도 석탄을 캐서 가족을 건사한 선배·동료 광부이다.

가족의 일생을 관통한 탄광은 그에게 여러 감정이 뒤섞인 애증의 공간이다.

김씨는 "광부들은 퇴근하고 소주라도 한잔 마시려면 꼭 집에 전화로 알린다"며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는지 가족들도 알기 때문에 늦으면 늦는다고 반드시 연락한다"고 말했다.

채탄작업 하는 광부


[광부 김용승 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지금이야 안전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는 작업 환경이 마련됐지만, 김씨 아버지 세대의 광부는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며 다시 막장으로 돌아가곤 했다.

출근길에 만났던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소주 한 잔 툭 털어 넣고 검댕 묻은 시신을 손수 닦아 마지막 여정을 배웅하던 시절이었다.

김씨는 "지열과 습도, 땀 범벅인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다이너마이트 화약 냄새,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까지 광부들은 시꺼멓고 비좁은 갱도 안에서 불안과 공포를 끈끈한 동료애로 견뎌낸다"고 말했다.

그는 딱 일주일만 참아보자, 한 달만 견뎌보자, 6개월은 채워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인 광부 생활이 18년째 접어들었다.

하루하루를 허덕였던 막내 광부는 어느덧 갱도 가장 깊은 최일선에서 채탄 작업팀을 이끌게 됐다.

그 사이 약 400명이었던 동료들 숫자는 270명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화순탄광의 광부는 한때 1천500명에 육박했다. 3교대로 밤새 캐도 석탄이 부족했던 산업화 시기였다.

탄광 내 이동수단


(화순= 천정인 기자 = 지난달 31일 전남 화순군 동면 화순광업소 동갱 내부에서 관계자들이 이동수단인 '인차'를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석탄을 찾는 곳은 줄고 해마다 구조조정을 거치다 보니 함께 일한 동료들이 뚝뚝 줄어들어 있더라. 마음이 삭막했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 자체가 없어진다고 하니 잠도 안 온다"며 "앞으로 뭐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막막하다"고 화순탄광 광부의 마지막 세대가 된 심경을 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광부들만 흘릴 수 있는 검은 눈물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내도 닦이지 않는 몸속의 탄가루는 눈물샘으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화순탄광 광부들의 대표 격인 송병진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노조지부장은 "이곳 광부들은 대부분 부자, 형제, 사돈, 팔촌이 함께 일하거나 3대에 걸쳐 내려오는 등 진짜 가족들"이라고 전했다.

손 지부장은 "서로 끈끈한 정으로 뭉쳐 살아온 광부들은 어떤 어려움도 단결력으로 헤쳐왔다"며 "광부로 다져온 자긍심과 뚝심이 있기 때문에 폐광이라는 시련도 이겨내고 우리 사회의 산업역군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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