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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별천지] ⑫ '메밀꽃 필 무렵' 소설 속 허생원의 장돌뱅이길
기사 작성일 : 2023-09-16 09:00:35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이야기를 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효석문화제 축제위원회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평창= 이재현 기자 =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산 이효석 선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주인공 허생원이 조 선달, 동이와 함께 대화장으로 넘어가던 달밤의 고갯길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축제장 야간 조명


[촬영 이재현]

현대 단편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이 소설의 실제 무대인 봉평면 효석문화마을은 지금 메밀꽃만큼이나 숨이 막힐 정도로 축제가 한창이다.

1936년 소설 발표 이후 62년 뒤인 1999년부터 허생원과 성씨 처녀의 사연이 있는 물레방앗간과 메밀꽃밭, 흥정천을 무대로 효석문화제가 해마다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매년 30만명이 찾아와 이효석 문학의 세계에 빠져 감수성을 싹 틔운다.

허생원 일행이 대화장으로 가기 위해 넘던 고갯길인 장돌뱅이 길은 효석문학 100리길로 거듭나 관광 산업을 꽃피웠다.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서린 봉평장과 대화장은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설 현대화로 재도약에 나섰다.

봉평면과 대화면을 잇는 고갯길인 '재산재' 자락엔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가 들어서 그린바이오 산업의 메카로 변신해 가고 있다.

봉평 메밀꽃밭서 당나귀 타기 체험


[촬영 이재현]

◇ '효석문학 100리길'로 거듭난 장돌뱅이길

'대화까지는 칠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두 고갯길은 노루목과 재산재이고 허생원이 발을 빗디뎌 고꾸라져 몸채 풍덩 빠진 개울은 여울목이다.

여울목 표시목


[촬영 이재현]

여울목


[촬영 이재현]

평창군은 소설 속 주인공인 허생원과 동이가 오가던 장돌뱅이길을 '효석문학 100리길'로 재탄생시켰다.

강, 들, 숲 등 옛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문화를 체험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인 봉평 효석마을에서 평창읍까지 ㎞에 5개 구간으로 나눠 조성했다.

1구간 '문학의 길'은 이효석 선생 생가∼흥정천∼용평면 백옥포리∼장평리 여울목까지다. 2구간 '대화장터 가는 길'은 여울목∼용평면 재산리∼대화면 신리∼대화장터까지 이어진다.

3구간 '강 따라 방림 가는 길', 4구간 '옛길 따라 평창강 가는 길', 5구간 '마을길 따라 노산 가는 길'로 구성됐다.

소설 속 이효석 선생의 명대사를 발췌해 구간 곳곳에 설치, 문학과 걷기를 통해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봉평 메밀꽃밭 달리는 문학 열차


[촬영 이재현]

효석문학 100리길은 문학 스토리텔링, 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소공원, 문학의 거리 등이 담겨 이야기가 있는 체류형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이 중 1구간 문학의 길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길이다.

이효석 문학관을 비롯해 효석문화제가 한창인 메밀꽃밭, 주변 경관이 수려한 흥정천을 걷다 보면 소설 속에 와 있는 듯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실제 장돌뱅이들이 봉평과 대화를 오가던 해발고도 600m의 재산재 정상은 4차선 도로가 시원스레 뻗어 있다.

다만 노루목은 1975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과 KTX 강릉선 개통으로 끊겨 현재는 고개 정상이 양분된 상태다.

해발 600m 재산재 정상


[촬영 이재현]

노루목 고개


[촬영 이재현]

◇ '전국 15대 장터' 대화장의 쇠락…소상공 장돌뱅이들의 애환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봉평장터에서 큰 수확을 보지 못한 허생원이 한몫 벌기 위해 흐뭇한 달빛에 밤새 걸어 향하던 대화장의 상황은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동이에게 업힌 허생원 조형물


[촬영 이재현]

동이에게 업힌 허생원 조형물


[촬영 이재현]

역(참)으로 인해 교통이 발달한 대화면 상업의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에 의해 만든 '만기요람'을 보면 대화장은 '전국 15대 시장 중 하나'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

한양에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간선 도로상에 역과 참이 있는 영서의 가장 깊은 내륙에 자리한 데다 영동과 교류가 빈번해 강원도에서 나오는 각종 물산이 대화에 모인다는 기록도 전한다.

옛말에도 '서울 동대문 밖에서 대화장을 보라'는 말처럼 횡성, 강릉 등지에서 말을 이용한 달구지 100∼500여대가 와서 성시를 이뤘고, 대화 우시장은 소 200∼500두가 넘어 면 소재지 여관은 초만원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1906년까지 강릉에 속했던 평창에는 봉평장(2·7일), 진부장(3·8일), 대화장(4·9일)이 잇따라 열렸다. 이곳을 다니던 상인들은 평창장, 미탄장, 노일장(정선)의 상인과는 지역적·정서적 측면에서 서로 달랐다.

야간 경관


[효석문화제 축제위원회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1913∼1917년 대관령 신작로가 뚫리면서 대화장에 보부상들이 붐비면서 옛 장터의 명성을 되찾기도 했다.

소설 발표 시기인 1938년 통계를 보더라도 평창군 6개장 중 대화장의 연간 거래액은 27만800원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평창장의 연간 거래액은 4만6천102원으로 대화장의 17% 규모였다.

하지만 1975년 영동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주요 교통로에서 소외되면서 지역 상권은 쇠락하고 인구도 줄었다.

400년 전통을 이어온 봉평장은 현재 관광객을 위한 주말장터가 운영 중이고, 대화장도 현대화 시설 개선에 나서는 등 옛 영광 재현에 나섰다.

봉평 메밀꽃밭에서 찰칵


(평창= 이재현 기자 = 2023평창효석문화제 사흘째인 10일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밭 포토존에서 방문객들이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효석문화제는 오는 17일까지 봉평면 이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 서울대 평창캠퍼스가 자리한 재산재…그린바이오 산업의 메카를 꿈꾸다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 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서울대 평창캠퍼스 전경


[촬영 이재현]

효석문학은 그린바이오 산업으로도 꽃을 피웠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대화면 재산재 옆 자락에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를 유치한 것이 지역 발전의 획기적인 전기가 됐다.

서울대는 도심의 팽창으로 시설을 이전해야 했고, 평창은 지역 미래 발전과 성장 동력으로 삼고자 이를 유치했다.

평창군 대화면 신리 일원에 262만2천㎡ 규모로 2014년 6월 준공한 평창캠퍼스 조성사업에는 3천360억원이 투입됐다.

여기에 더해 평창은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공모사업인 '그린바이오 벤처캠퍼스'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평창의 그린바이오 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농업생명자원에 생명공학기술 등을 적용해 고부가가치 제품 등을 만들어내는 신산업으로 국내 시장 규모만 2027년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몬산토, 바이엘, 켐차이나, 듀폰 등 다국적 글로벌 농업, 제약, 화학 기업 간 합병이 이루어질 정도로 세계적인 신 성장 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축제장 야간 경관


[효석문화제 축제위원회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에 평창이 선정된 그린바이오 벤처캠퍼스는 관련 창업 기업을 발굴해 육성하는 전문시설로, 2025년까지 231억을 투자해 조성한다.

평창군은 그린바이오 산업과 연계해 산양삼 특구로 지정된 봉평에 사업비 216억원을 들여 산양삼을 집중 육성 중이고, 대화에는 70억원 규모의 농촌 신활력 플러스 사업을 추진했다.

또 대관령에는 2025년까지 980억원을 투입해 첨단 스마트 농업 단지를 조성 중이며, 진부에는 6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특용작물 산업화지원센터를 구축 중이다.

효석문화제 포토존


[촬영 이재현]

향토사학자 정원대씨는 "이효석 선생이 어릴 적 봉평에서 군 소재지의 보통학교로 오가던 기억을 되살려 고향 생각을 하며 평양에서 써 내려간 소설이 바로 메밀꽃 필 무렵"이라며 "소설 속 무대가 문학으로 되살아나 지역의 관광·산업으로 만개한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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