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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1등 의사 홍보물…교육 파탄 드러내는 역사적 기록"
기사 작성일 : 2024-03-22 07:00:33

이동하는 의료진


[ 자료사진]

송광호 기자 = "당신들은 어떤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습니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만 전념한 의사인가요, 아니면 실력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에 의해 공공병원 의사가 된 의사인가요."

코로나 시기 문재인 정부가 의대 정원을 1년에 400명씩, 10년간 4천명을 늘린다고 발표했을 때, 한 의사단체가 반발하며 발표한 홍보물 내용이다. 중앙대 김누리 독문과 교수는 이 내용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전교 1등'이라는 말이 왜 나올까요? 어떻게 다 큰 성인이 유치하게도 오로지 학창 시절의 성적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초등학생이 써도 이런 천박하고 어리석은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교육이 길러낸 엘리트 집단이 얼마나 미성숙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성명서(홍보물)는 대한민국 교육이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입니다."


한 의과대학에 붙여진 손팻말


[ 자료사진]

2022년 기준 한의사를 제외한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천명당 2.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코로나 시절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발표했을 때, 의료 서비스 수요자인 국민 상당수가 정부 시책에 찬성한 이유는 의사 수를 늘리면 더 쉽게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 공급자인 의사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밝히자 극렬한 반대 투쟁에 나섰다. 4천명이 아니라 단 1명도 늘리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OECD 기준으로 우리보다 인구 1천명당 의사 수가 2배 이상 많은 독일(4.4명) 의사들이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 보인 반응은 어땠을까.

코로나를 혹독하게 겪은 독일 정부가 전체 의대 정원의 50%를 늘리겠다고 발표했을 때, 독일 의사협회는 "정부의 정책은 너무도 타당하다. 지금 의사들이 과중한 업무로 인해 과로사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의료서비스의 질도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니 의사 수를 파격적으로 늘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어떻게 비슷한 사안을 두고 이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일 수 있었을까.

김누리 교수는 "독일 의사가 다른 의사를 보호하고 연대해야 할 동료라고 생각한 반면, 한국 의사는 다른 의사를 '경쟁자', 심지어는 '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학교에서부터 (입시) 전쟁을 치른 한국 의사들은 이런 트라우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길어지는 의료공백


[한 대학병원에 붙은 안내문]

김 교수에 따르면 의사와 정부의 갈등은 실패한 한국 교육의 맨얼굴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경쟁과 능력주의, 공정이라는 "야만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살아남은 승자들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이들 "한국 교육의 승자는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와 권력은 곧 자신이 전쟁터에서 쟁취한 '전리품'이라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오늘날 한국 교육이 길러낸 '전교 1등'들이 거의 예외 없이 미성숙하고 오만한 엘리트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사활을 건 경쟁 교육'의 필연적 결과"라고 지적한다.


'안길 곳'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관계자가 아이를 안고 이동하고 있다.

김 교수는 신간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를 통해 이 같은 경쟁 교육의 부작용을 조명한다. 그는 한국 교육의 실패 사례를 가감 없이 전하면서 학벌 계급사회,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학교 현실, 자본의 노예가 된 대학 상황 등을 준열히 비판한다. 아울러 의사를 포함해 경쟁 교육의 승자들인 엘리트들을 향해서도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환자의 목숨을 볼모로 의료 파업을 일삼는 의사들, 사법 농단을 저지른 고위 판사들에 대해 무죄 판결로 일관하는 판사들, 고위 검찰 간부들에 대한 '봐주기 수사'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검사들의 행동은 한국 엘리트들의 민낯을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보편적 정의의 편에 서기는커녕, 이처럼 집단적 이기주의에 매몰된 미성숙하고 무책임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김 교수는 이런 토양을 바꾸기 위해선 경쟁 사회의 토대인 우리 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능력주의 교육에서 '존엄주의 교육'으로, 성장을 위한 교육에서 '성숙을 위한 교육'으로, 경쟁 교육에서 '연대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해냄.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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