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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기만 해도 냄새 배던 성수동 갈비골목…이젠 카페만 줄줄이
기사 작성일 : 2024-03-24 10:00:35

서울 성동구 성수동 갈비 골목


최윤선 기자 = 22일 서울 성동구 성수 갈비골목 내 없어진 한 갈빗집이 빈 건물로 남아있다. 2024.03.22

최윤선 기자 = "반평생 지내면서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떠나려니 마음이 그렇지. 단골들도 서운해 해."

22일 오후 2시께 서울 성동구 성수동 갈비골목에서 만난 박춘연(76) 사장이 점심 백반 장사를 마치고 분주하게 설거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골목에서 26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박씨의 갈빗집은 다음달 말 골목에서 700m 떨어진 지하철 2호선 뚝섬역 인근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다.

역세권 근처의 더 나은 장소로 옮겨가는 것 같지만 속사정은 사뭇 다르다. 지난해 새로운 건물 주인이 증축을 결정하고 박씨에게 퇴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새단장한 건물엔 카페가 들어설 예정이다.

갈빗집을 차리기 전 같은 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던 세월까지 합쳐 40여 년을 골목에서 장사했다는 박씨는 "저 건널목까지 다 갈빗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며 "10여 개였던 가게가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명색이 갈비골목인데 갈빗집보다 카페가 더 많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2015년 당시 성수동 갈비골목 일대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나가기만 해도 갈비 냄새가 옷에 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던 성수동 갈비골목이 쪼그라들고 있다. 다음달 박씨의 가게마저 떠나면 골목에 남은 갈빗집은 세 군데뿐이다.

이 중 한 가게는 불경기와 건물 주인의 요청이 겹치면서 매장 규모를 절반 이상 줄였고, 오랜 시간 골목을 지켜온 나머지 두 가게도 무섭게 뛰어버린 임대료 탓에 근심이 큰 상황이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갈비골목이 자리 잡은 성수1가2동의 임대료는 1층 상가 기준 3.3㎡(1평)당 월 24만9천원 수준이 됐다.

2015년 4분기(10만1천원) 대비 임대료가 약 2.5배로 뛴 것이다. 불과 2년 전인 2021년 4분기(16만3천원)와 비교해도 1.5배가 됐다.

이전할 장소를 정한 박씨의 형편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박씨와 같은 건물에서 40여 년간 정육점을 운영해 온 60대 오모씨는 4월 말 퇴거를 앞두고 있지만 임대료 부담이 심한 탓에 아직 가게를 옮길 곳을 찾지 못했다.

오씨는 "골목에서 함께 장사하던 갈빗집과 슈퍼, 전파사와 세탁소가 무슨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 엇비슷한 이유로 멀리 떠나거나 가게를 접었다"며 "근처 철물점도 건물주가 카페가 들어올 예정이니 나가라고 해서 곧 없어지는데 이제 골목에 남는 현지인은 손에 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지속 가능한 상생도시 성동"


최윤선 기자 = 대기업·프랜차이즈 신규 입점 제한되는 '성수동 지속가능발전구역'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성수동 갈비골목 초입에 붙어 있다. 2024.03.22

이들의 처지는 성수동 전역에서 심화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둥지 내몰림 현상'으로 불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했던 지역이 번성해 인파가 몰리면서 임대료가 크게 뛰어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미 홍대 주변을 비롯해 삼청동, 가로수길, 경리단길 등 서울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성수동의 경우 과거 수제화 구두 공방과 자동차 정비소, 봉제 공장 등이 밀집한 공업단지였으나 10여년 새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개성 있는 수제 맥주 가게부터 레스토랑, 옷 가게 등이 들어서며 젊은층을 끌어들이는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것이 시작이었다.

최근 몇년 새에는 국내외 고급 브랜드가 들어서며 상권이 커지고 기업 신제품 홍보를 위한 팝업 스토어 '성지'로 떠오르면서 임대료 상승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을 면치 못했다.

관할 구청인 성동구청도 2015년 전국 최초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내놓는 등 원주민들이 밀려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갈비골목 인근의 서울숲길과 뚝섬역 인근을 중심으로 설정한 '성수동 지속가능발전구역'을 성수역과 연무장길 일대 등지로 확장하는 것을 뼈대로 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 2.0'도 추진 중이다.

이 구역에선 대기업·프랜차이즈 가맹본부의 신규 입점이 제한되고 건물주와 임차인, 성동구 간 상생 협약 체결이 권장된다.

그러나 이는 '권장'에 불과할 뿐 법적 구속력은 없다. 이렇다 보니 갈비골목 300m 반경에만 100개가 넘는 카페가 들어서 서로 경쟁하는 실정이다.

오씨는 "노포는 사라지고 전부 카페만 들어서면 그 사람들끼리는 어떻게 벌어 먹고살겠냐"며 "건물주들이 그런 부분을 고려하고 또 양보해서 다양성을 살리는 데 힘쓰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전 소식을 알리는 박춘연 씨 가게 앞 입간판


최윤선 기자 = 오는 4월 말 골목에서 700m 떨어진 지하철 2호선 뚝섬역 인근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는 박춘연 씨 가게 앞에 이전 소식을 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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