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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이 되어 깨달은 타인의 마음…'전쟁의 소문 속에 살았다'
기사 작성일 : 2024-04-07 09:00:32

영화 '박열'에서 가네코 후미코


[메가박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송광호 기자 =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후미코는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을 나간 부친과, 다른 남자를 집에 불러놓고 딸을 집에 들이지 않은 모친이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 식민지 조선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빈곤하다는 이유로 천대받았다. 그는 일본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조선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조선인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다. 그중에 박열이 있었다.


영화 '박열'에서 박열


[메가박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박열과 그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둘의 분노는 제국주의를 강화하는 일왕을 향했고, 일왕과 그의 가족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별다른 증거 없이 둘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후미코는 추후 일왕의 명으로 사면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암살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으므로 사면받을 까닭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독방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금 나는 왕의 용서를 거부할 용기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길고 긴 시간 내내 이 용기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후미코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


[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본의 대표적 철학자 고(故) 쓰루미 슌스케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를 읽고, 이 순간을 영원히 지키고자 하는 후미코의 직관을 읽어낸다. 그는 후미코가 소(小)-중(中)-고(高)-대(大)학교로 이어지는 메이지 국가가 만들어낸 학교의 계단을 오르지 않고도 "자신의 사상으로 영원에 대한 직관을 풀어냈다. 그는 그런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에세이 '전쟁의 소문 속에 살았다'에서 썼다.

책은 쓰루미 슌스케가 여든 살부터 여든여섯 살까지 7년 동안 쓴 글을 모았다. 그를 통과한 시대의 풍경을, 그가 읽고 보고 느꼈던 생각의 편린을 단정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여든 살이 되었다. 어린 시절 길에서 보던 느린 걸음의 노인들이 떠오른다. 내 모습이 그들과 가까워지니 그 마음도 알 것 같다."


전설의 배우 그레타 가르보


[ 자료]

책은 그런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젊은 날 후미코의 결연한 마음, 지나가는 노부부를 부러워하며 '명성과 욕망이 자신을 망쳤다'고 한탄한 배우 그레타 가르보의 후회하는 마음, 장애를 지닌 아들 히카루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가사를 쓰고 직접 노래까지 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애잔한 마음, 친구 마루야마 마사오의 죽음에 부쳐 그와 나눈 한담을 그리워하고 그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적 깊이를 흠모하는 저자의 경의(敬意) 등 그가 만나고 부딪힌 무수한 마음들을 책에 담았다.

그런 마음들이 전하는 '내면의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다 보면 슬픔, 망설임, 고뇌, 절망, 의심, 곤혹, 회의와 같은 타인의 감정들이 느껴진다. 그런 감정에 대한 공감이 아마도 그를 전후를 대표하는 반전 사상가가 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썼는데, 이 말은 저자에게도 통할 것 같다. 책에는 '진짜 감정'을 지닌 여든 넘은 노인이 지향하는 삶에 대한 태도 같은 것들이 묻어있다.

글항아리. 김성민 옮김. 304쪽.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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