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 억새밭 [사진/백승렬 기자]
(포천= 김정선 기자 = 연말을 앞두고 한해를 반추할 수 있는 장소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해발 923m)은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억새 군락지다.
햇빛과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물결을 찾아 길을 떠났다.
◇ 반추의 여정
이맘때쯤 되면 다사다난했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게 된다.
새해를 앞두고 각오를 다져보기도 한다.
한 해를 반추하면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다.
올해의 여정을 되새기고 새로운 시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취재팀이 길을 떠난 날은 계절의 정취가 가득했다.
파란 하늘 아래 잎을 떨군 가로수가 보이더니 도시를 벗어나자 건너편 산에선 절정을 지난 듯한 단풍이 눈에 띄었다.
서울 인근에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 명성산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차량 문을 열고 나오니 손끝이 약간 시린 느낌을 받았다.
초보 등산객인 필자로서는 처음 가 보는 산의 풍경이 내심 궁금해졌다.
◇ 명성산 입구 풍경
명성산 올라가는 길의 단풍 [사진/백승렬 기자]
등산로를 걷기 시작하자 나뭇잎의 여러 빛깔이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울긋불긋하면서도 잿빛이 섞여 있었다.
길가에 핀 노란 소국, 진한 주홍빛 마리골드꽃이 반갑게 느껴졌다.
해물전과 찐 옥수수 등을 파는 식당과 상인들이 보였다.
평탄한 길을 상상했지만, 시작부터 오르막길이었다.
벌써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는 이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입구인데도,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혼자서 묵묵히 걷는 사람들도 많았고 젊은 커플부터 노부부로 보이는 이들까지 다채로웠다.
얼마 안 가 취재팀은 등산로 안내판 앞에 멈췄다.
코스는 경사가 완만한 것으로 알려진 제1코스로 정했다.
억새밭까지는 총 3.9km 거리다.
안내판은 이와 함께 명성산(鳴聲山)의 전설을 소개했다.
왕건에게 쫓겨 피신하던 궁예가 이 산에서 피살됐다고 하며 그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는 설, 주인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어 울음산으로 불렸다는 설이 적혀 있었다.
◇ 계곡과 경삿길
위에서 내려본 등룡폭포 [사진/백승렬 기자]
몇분 지났을 뿐인데 숨이 차 왔다. 간혹 평평한 흙길이 나오긴 했지만 등산 경험이 적은 필자에게는 여기저기 돌이 있는 경삿길이 많아 보였다.
그동안 잘 정리된 둘레길 위주로 다녔던 터라 유난히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여러 빛깔의 파스텔로 칠해놓은 듯한 단풍의 조화를 만끽할 수 있었다.
초록, 노랑, 붉은빛의 나뭇잎들이 한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발밑에는 돌이 밟히는 등산로가 있고 양옆으로는 빛깔 고운 단풍나무들이 사선과 직선을 이루며 서 있는 풍경이 묘하게 다가왔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돌탑 주변에 다다랐을 땐 필자도 바위 아래 작은 돌멩이를 찾아 하나씩 얹었다.
등산로 옆에는 계곡이 이어져 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명쾌했다.
계곡을 이루는 크고 작은 바위가 이채로웠다.
너럭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등산객의 모습을 보고선 '신선이 따로 없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등룡폭포 인근에는 보행로가 조성돼 있다.
보행로에 올라가 기암절벽을 따라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내려다보니 장관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1.3km만 가면 억새밭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이때부터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가 간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일었다.
◇ 눈앞에 펼쳐진 억새 군락지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사진/백승렬 기자]
오르막길을 또다시 걸었다.
군락지에 다다른 것일까.
저만치 앞에 은빛과 잿빛이 함께 보이는 억새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억새의 키는 1∼2m 정도로 보였고, 기다란 줄기는 진한 녹색과 갈색을 띠고 있었다.
총 15만㎡의 벌판에선 매년 가을 만개한 억새꽃이 장관을 연출한다.
왼쪽을 바라보니 햇빛을 받아 은빛을 띤 억새가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처음 보는 풍경에 '와'하는 함성이 여러 번 나왔다.
순간 주변이 잠시 고요하게 느껴졌다.
잠시 뒤 등산객들의 함성이 연이어서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왼쪽 억새밭에선 '사르르 사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와는 달리 오른쪽 억새밭에선 은빛보다는 겨울을 앞둔 듯한 갈색이 많아 보였다.
명성산 억새밭에서의 휴식 [사진/백승렬 기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릴 때는 메마르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를 생명력이 느껴졌다.
온갖 감각으로 억새를 느끼기 위해 산에 올라왔구나 싶을 정도로 풍경이 경이로웠다.
억새 군락지는 억새바람길, 억새풍경길로 나뉘어 있어 등산객이 있는 지점에 따라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억새를 몇분간 바라보며 '멍때리기'를 했다.
사진을 찍어보니 억새의 솜털 같은 부분이 더욱 은빛으로 반짝였다.
억새 군락지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는 병풍처럼 서 있었다.
등산객들은 전망대에 올라 '야호'를 외치거나 간식을 먹고 있었다.
취재팀도 준비해 온 김밥을 먹으며 풍경을 바라봤다.
건너편의 구불구불한 산세, 맑은 하늘과 흰 구름이 잘 어우러졌다.
이 시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일 것이다.
◇ 산정호수의 윤슬
산정호수 [사진/백승렬 기자]
이날은 산에 올라가는 길에 억새밭 팔각정까지만 등산이 가능하다는 안내판을 봤기에 취재팀은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인근 산정호수로 향했다.
'산정'은 산에 있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1925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됐는데, 1977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포천은 명성산과 산정호수 외에도 국립수목원처럼 자연을 즐길 곳이 많다.
노랗고 붉은 단풍 사이로 넓게 펼쳐진 호수가 보였고, 그 위로 작은 보트를 탄 사람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둘레길에는 억새를 기다랗게 세워놓은 구간이 있어 계절의 정취를 더했다.
가까운 호수 표면에는 윤슬이 비쳤고, 건너편에는 데크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반짝거리는 윤슬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사는 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