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드 정권의 몰락을 기뻐하는 시리아인들[로이터 . 재판매 및 DB 금지]
(로마·베를린·서울= 신창용 김계연 특파원 장재은 기자 = 시리아의 권위주의 정권이 반군의 반격에 무너지자 유럽 각국이 시리아 피란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하고 나섰다.
대규모 난민 유입에 따른 치안과 사회갈등 악화, 정치적 양극화 등 현실적 난제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적절한 명분이 생기자 촉발된 이민규제 강화 신호로 관측된다.
로이터, AFP통신 등에 따르면 독일 연방이민난민청은 시리아 독재정권의 붕괴를 이유로 들어 시리아 피란민 망명 심사를 보류한다고 9일(현지시간) 밝혔다.
계류 중인 시리아인 망명 신청은 4만7천270건이다.
낸시 페저 독일 내무장관은 이번 결정이 이미 허가된 망명 자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시리아 정세가 명확히 평가될 때까지 망명 신청을 처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페저 장관은 "아사드의 독재는 고문, 살인, 테러에 고통받던 많은 이들에게 큰 안도"라고 덧붙였다.
시리아에서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이끌던 폭압적 권위주의 정권이 반군에 무너지면서 내전 종식의 기대가 크다.
그러나 시리아 주요 반군 중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많고 서로 적대적인 세력도 있어 내전이 실제로 끝날지, 민주적인 정권이 출범할지 미지수다.
페저 장관도 "현재로서 시리아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워 (이주민) 귀환의 구체적 가능성을 예단할 수 없다"고 이 같은 상황에는 공감했다.
영국도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주요 이유로 들어 시리아 난민의 망명 절차를 일단 중단하고 나섰다.
영국 내무부는 "현재 상황을 평가하는 동안 시리아 망명 신청 처리를 일시 보류했다"며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망명 신청과 관련된 모든 국가 지침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그리스 정부도 시리아 피란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다.
프랑스 역시 조만간 같은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내무부는 이미 허가한 망명 자격도 다시 검토하겠다고 했다.
2015년 유럽의 난민 사태 때 유럽을 향해 밀려들던 시리아 피란민들 [AP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유럽 국가들의 이번 동시다발적 조치는 이주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커지는 추세 속에 이뤄졌다.
유럽연합(EU)의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이 격화한 2015년부터 2023년까지 EU에서 난민으로 보호받는 시리아인은 130만명 정도다.
이 기간에 시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 이주민의 전체 규모는 내전 전 시리아 인구의 20% 정도인 450만명 정도에 달한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는 시리아 국적자 약 97만명 가운데 약 78만명이 망명 자격을 얻었거나 신청한 상태다.
유럽에서는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11만명), 스웨덴(9만명), 네덜란드(8만명) 등지에 시리아 출신 난민이 많이 거주한다.
이들 국가는 인도주의와 노동력 확충 차원에서 받아들인 시리아 이주민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사회적 혼란에 시달렸다.
민족주의 보수 진영에서는 치안 불안과 실업 증가 등의 원인으로 이주민을 지목하며 난민을 포용하는 정책 기조를 비판했다.
이민자에 대한 분노에 따른 사회 분열을 동력은 삼은 극우, 극좌 포퓰리스트들은 일부 국가에서 집권에 참여할 정도로 득세해 이민규제 강화를 압박했다.
시리아 사태 때 가장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던 독일, 전통적으로 이주민에게 포용적이던 스웨덴조차 기존 정책 기조에 최근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이뤄진 아사드 정권의 붕괴는 시리아 내전의 실제 종식은 둘째치고 이민규제를 강화할 확실한 명분으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실제로 유럽 각국 우파 진영은 한발 더 나아가 시리아 피란민을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중도보수 야당인 기독민주당(CDU)의 옌스 슈판 원내부대표는 시리아행 전세기를 띄우고 정착비용으로 1천유로(약 151만원)씩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보수 성향 오스트리아국민당(ÖVP) 소속 게르하르트 카르너 내무장관은 "질서 있는 송환과 추방 절차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는 시리아 난민의 상당수가 시아파인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탄압을 피하려 했던 수니파 주민인 만큼 수니파 반군의 승리를 계기로 귀향길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다만 경계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시리아로 향하는 이 흐름은 빠르게 역류할 수 있으며, 위험한 불법 이주 경로를 통해 유럽 대륙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증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유럽연합(EU)은 시리아를 폭압 통치해온 아사드 정권의 붕괴를 환영하면서도 당장 난민 귀환 조건이 갖춰지지는 않았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EU 외교정책 대변인은 반군 주도세력인 하야트타흐리트알샴(HTS)이 EU 제재 대상에 올라 있으며 현재 HTS와 접촉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시리아 재건 과정은 길고 복잡할 것이며 모든 당사자가 건설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