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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 이후 100년, 서울의 변화는…보고서 발간
기사 작성일 : 2025-02-04 07:00:40

을축년 대홍수에 구용산 일대가 침수된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윤보람 기자 = 서울역사박물관은 100년 전 서울에서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乙丑年 大洪水)를 연구한 서울기획연구 12 '을축년 대홍수 그 후 100년, 서울의 변화'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4일 밝혔다.

1925년 7월 9∼11일과 15∼19일 두 차례에 걸친 집중호우의 양은 753㎜에 달했고 복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연이은 폭우로 엄청난 피해를 봤다. 당시 한강의 수위는 용산 기준 12.74m로 현재까지의 최고 기록이다.

대홍수 발생 직후 총독부는 부족한 구제비를 충당하기 위해 의연금(사회적 공익이나 자선을 위하여 내는 돈) 모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복구대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사회의 신문사, 청년회 등이 주축이 돼 공적 구호가 닿지 않는 곳에서 수재민의 구출, 식량·의복 구호 등에 나섰다.

식민지 시기 차별 속에서도 각지의 주민들은 상호 연대하면서 지역 공동체를 복구해 갔다.

이촌동에서 이주한 주민들은 도화동에서 양영학교를 중심으로, 노량진 복흥촌에서 복흥촌 진흥회를 중심으로 주변 원주민과 연대하며 일상을 꾸려 나갔다.

을축년 대홍수는 도시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강 치수사업을 전제로 한 도시 확장 구상을 지향하면서 1930년대 경성시가지계획의 구체적 실행안에 관련 내용이 담겼다.


1983년 한강종합개발과 올림픽대로 확장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광복 후 여러 차례의 대규모의 홍수 피해를 겪을 때마다 을축년 대홍수의 참혹한 기억이 소환되면서 한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960∼70년대 한강 주변에 높은 제방이 건설됐으며 공유수면 매립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제방에는 도로가 놓였다. 1982∼86년에는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시행돼 서울시민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됐다.

보고서는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더는 1925년 참혹했던 을축년 대홍수를 떠올리지 않는다"며 "재난의 기억은 한강을 '두려움의 대상'에서 '우리 삶의 일부'로 변화시켰다"고 짚는다.

보고서는 서울책방 누리집(https:https://store.seoul.go.kr)과 서울역사박물관 내 뮤지엄 숍에서 구매할 수 있다. 오는 9월에는 관련한 기획전시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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