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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독도 향한 열정과 의지…세 차례 학술조사가 남긴 것
기사 작성일 : 2024-03-20 10:01:21

1947년 8월 촬영한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모습


사진 상단에 '울릉도, 독도'라고 적혀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예나 기자 = "독도행은 실행 전까지는 외부 발표를 시종 보류하고 있었으나, 우리가 당초부터 계획해온 기습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한성일보에 실린 홍종인의 '울릉도학술조사대보고기' 중에서)

1947년 5월 당시 조선산악회(이후 한국산악회로 개칭)는 회의를 열고 학술조사대 파견 시기와 방법을 논의했다.

일제로부터 되찾은 우리 국토의 자연환경과 지질, 동·식물, 방언 등을 조사하는 '국토 구명 사업'의 일환인 학술조사 대상지는 울릉도와 독도였다.

산악회는 1947년 8월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물품과 교통편에 대한 협조를 정부 부처에 요청했으나 그에 앞선 6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에 당시 과도정부에서는 '독도에 관한 수색위원회'를 조직했고, 미군정장관은 출장 명령을 통해 과도정부 소속 공무원들이 조사단에 동행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1947년 8월 촬영한 제1차 울릉도학술조사대 모습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울릉도와 독도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던 1947년 첫 학술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한국산악회가 기탁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관련 자료를 정리한 '1947∼1953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를 펴냈다고 20일 밝혔다.

자료집은 1947년·1952년·1953년 등 총 세 차례 이뤄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 과정을 각종 공문서와 신문 기사, 당시 촬영한 사진 등으로 풀어 설명해준다.

한국산악회가 기탁한 자료 200여 점 가운데 지난해 선보인 '1947,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를 가다' 전시에서 공개한 내용을 토대로 조사단의 활동과 그 성과를 정리했다.

첫 학술조사를 앞두고 선박 운항 중에 발생하는 사고로 인한 모든 피해의 책임은 학술조사대와 대원 각자가 질 것이라고 쓴 '각서'부터 미군정청의 출장 명령 공문 등을 함께 볼 수 있다.


1953년 10월 독도 표석을 설치한 뒤 기념 촬영을 한 3차 학술조사단 모습


김한용 씨가 촬영한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독도에 도착하기까지 험난했던 여정도 생생하게 담겼다.

조사단이 떠난 1940∼1950년대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최대 12시간이 걸렸고, 육지에서 울릉도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는 데 12∼20시간 정도 소요됐다고 한다.

실제로 3차 조사단의 경우, 1953년 10월 3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로 12시간 이동했고, 부산에서 울릉도까지는 배로 20시간, 독도까지는 4시간 30분 더 걸렸다. 말 그대로 강행군이었다.

멀미를 이기려 뭔가를 입에 물고 있거나, 출렁이는 파도를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누워있는 조사대원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1953년 독도 3차 조사에 참여한 김연덕 씨


지난해 열린 전시 개막식에 참석한 모습 [ 자료사진]

자료집에서는 1953년 제3차 조사단에 참가한 김연덕 옹의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일찌감치 쓰러지자 10시경 주위가 소란해 자라 모양 대가리만 슬리핑 백 속에서 내밀어 살펴보니 멀리 조그만 섬이 보인다." (김연덕 '독도행각' 중 '울릉도에서 독도 가는 배 위에서')

세 차례 활동을 거쳐 조사단이 남긴 표목(標木·무엇을 표시하기 위해 세우거나 박은 말뚝)과 독도 명칭이 새겨진 표석, 조사단의 활동 모습 등도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재단은 "당시 혼란한 사회상에서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해 독도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고 영토 수호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노력이 기억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자료집은 재단 누리집에서 e북으로 볼 수 있다.


자료집 표지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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