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 구간 달리는 호남선
(나주= 천정인 기자 = 14일 오전 전남 나주시 다시면 호남고속철도2단계 공사 구간에서 호남선 열차가 붕괴 조짐이 보이는 임시선 구간을 지나고 있다. 2024.11.21
(나주= 천정인 기자 = 광주 송정역과 전남 목포역을 오가는 호남선 열차가 특정 구간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 위로 위태로운 운행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호남고속철도 2단계 공사를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선로 아래 흙더미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안전조치는 주먹구구에 그쳐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기울어진 안전 가시설 '아찔'
21일 취재를 종합하면 광주송정역에서 전남 목포역을 오가는 호남선 열차는 지난해 8월부터 현재까지 임시 선로를 활용해 운행하고 있다.
기존의 선로는 현재 신설 중인 호남고속철도 2단계 공사 구간과 맞물려 철거된 상태다.
나주시 고막원역에서 목포 방향으로 1.4㎞가량의 임시선이 만들어지면서 역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는 임시 교량(가교)도 설치됐다.
이때 교량과 선로(노반)의 높이를 맞추고, 교량의 지주를 더 단단하게 고정하기 위해 교량과 노반이 만나는 곳(접합부) 아래에는 흙더미를 쌓아 올렸다.
기울어진 안전 가시설
(나주= 천정인 기자 = 14일 오전 전남 나주시 다시면 호남고속철도2단계 공사 구간에서 호남선 열차가 지나는 임시선 아래 성토된 흙더미가 밀려나 안전 가시설이 기울어져 있다. 2024.11.21
문제는 이 흙더미가 붕괴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흙더미가 무너지지 않게 수직으로 설치해 둔 '흙막이 가시설(보강 가시설)'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구분될 만큼 기울어졌다.
무너지려는 흙더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가시설이 변형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대로 둘 경우 자칫 선로가 뒤틀리거나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 기차가 이탈하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현장 사진을 확인한 한 구조안전 전문가는 "당장 조치가 필요할 정도로 사고의 위험성이 있어 보인다"며 "열차가 운행되는 구간이라면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 시공사, 문제점 알고도 보고 누락하고 임의 조치
흙더미가 붕괴할 조짐이 보이는 지점에서 불과 2~3m 떨어진 곳에서는 신규 고속철이 오가는 교량(송촌교 교대 A1)을 설치하기 위한 터파기 공사가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이뤄졌다.
터파기의 깊이에 비례해 주변 지반의 압력이 늘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해당 터파기 공사로 인해 임시선 흙더미의 압력이 크게 늘어났을 것이라는 평가다.
기울어진 안전 가시설
(나주= 천정인 기자 = 14일 오전 전남 나주시 다시면 호남고속철도2단계 공사 구간에서 호남선 열차가 지나는 임시선 가교 아래 성토된 흙더미가 밀려나 안전 가시설이 기울어져 있다. 2024.11.21
그러나 터파기 공사는 인접해 있는 임시선의 안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나마 터파기 공사를 한 시공사 측은 이러한 설계상의 문제를 사전에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공사를 시작하기 한 달 전인 지난 4월 설계에는 반영돼 있지 않은 흙막이 가시설을 해당 흙더미 앞에 설치했다.
시공사 관계자는 "보다 안전하게 공사를 하기 위해 당초 설계에는 없었던 가시설을 추가로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시공사의 조치가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임의 조치에 그쳤다는 점이다.
시공 과정에서 설계상 예상치 못한 문제를 발견하면 발주처인 국가철도공단에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설계에 다시 반영해 공사를 진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절차는 모두 생략됐다.
그러다 보니 터파기 공사로 인해 인접한 흙더미의 압력이 얼마나 증가할지, 증가하는 토압을 견디기 위한 적절한 안전시설은 무엇인지 등과 같은 검토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시공사가 임의로 설치한 가시설에는 시방서상 반드시 설치하도록 한 계측기도 달아놓지 않았다.
결국 붕괴 조짐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가시설이 얼마나 기울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승객을 태운 호남선 열차는 아찔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던 셈이다.
시공사 측은 "흙막이 가시설이 아니라 보강 가시설이기 때문에 계측기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구조 안전 전문가는 "명칭을 어떻게 사용하든 토압을 견디기 위해 설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위(기울어짐)를 측정하기 위한 계측기 설치는 필수"라고 말했다.
기울어진 안전 가시설
(나주= 천정인 기자 = 14일 오전 전남 나주시 다시면 호남고속철도2단계 공사 구간에서 호남선 열차가 지나는 임시선 가교 아래 성토된 흙더미가 밀려나 안전 가시설이 기울어져 있다. 2024.11.21
◇ "안전하다" 해명에도 붕괴 우려 계속
시공사 측은 붕괴 조짐이 나타나지 않은 멀쩡한 지점(인접 전철주)의 계측 기록을 근거로 "침하 기준치 내에서 관리되고 있다"는 해명을 내놨다.
그러나 시공사는 붕괴 조짐이 나타난 가시설의 기울어짐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듯 지난달 29일부터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버팀 지지목을 2차례 설치했다.
두 번째 버팀지지목이 설치된 이달 5일부터는 육안 계측 방법인 침하타깃 계측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가시설의 변위에 대해서는 발주처에 보고하지 않았다.
시공사 측은 "발주처 승인을 받아 지지대를 설치했고, 지지대를 설치한 이후에는 가시설이 추가로 밀려나지 않고 있다"며 "측정치상 안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변위 사실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3명의 선로 보수요원이 현장에 상주하며 선로 변형 등을 확인하고 있지만 특이사항은 없는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진단은 달랐다.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로 버티고 있어야 할 가시설이 이미 기울어졌다면, 버팀목 등 보강 조치는 임시방편일 뿐 현재의 상태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조원철 명예교수는 "버팀목을 댔다는 것은 불안정하다는 의미이고,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기 위해서는 계측을 반드시 해야 했다"며 "계측도 없이 보강했다는 것은 주먹구구식 조치에 불과하고 굉장히 불안정한 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토목시공 기술사도 "가시설이 기울어진 것은 구조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미 기울어진 가시설은 언제든 더 기울어질 수 있고, 이는 언제든 붕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버팀목을 설치해 기울어짐이 멈췄다고 해도 임시방편일 뿐 그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며 "정확한 구조검토 등을 통해 안전상 적절한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해당 임시선 구간은 하루 평균 60여차례 열차가 오가고 있으며 최소 2026년 6월까지 계속 사용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