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23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16세 사이에 흰 상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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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신창용 특파원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충격적인 자진 사임 이후 교황으로 선출돼 전임 교황으로부터 직접 교황직을 인수·인계받는 드문 상황을 겪었다.
교황은 14일(현지시간) 전 세계 80개국에서 동시 출간된 자서전 '희망'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로마 남부의 교황 여름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에서 베네딕토 16세를 방문했던 일을 회고했다.
교황은 베네딕토 16세가 커다란 흰색 상자를 건넨 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면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과 관련된 문서들, 학대, 부패, 어두운 거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고 썼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까지 했고, 이런 조처를 했으며, 이런 사람들을 해임했으니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서전에서 "나는 그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6세가 프란치스코에게 건넨 상자에 어떤 자료가 담겼는지를 놓고 그간 온갖 추측과 소문이 무성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흰 상자'의 비밀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 자서전이 처음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서전에서 콘클라베(교황선출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순간도 회고했다.
당시 콘클라베에는 전 세계에서 115명의 추기경이 소집됐다. 누군가가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추기경 115명 중 3분의 2 이상인 77표를 얻어야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번째 투표에서 69표를 얻었을 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됐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다섯 번째 투표에서) 내 이름이 77번째로 불렸을 때,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며 "결국 몇 표를 얻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더 이상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기경들의) 목소리가 심사위원의 목소리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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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관련한 장에서 교황은 교회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chiesa'가 여성 명사라는 점을 언급하며 "교회는 여성이다. 남성이 아니다"라며 "여성들이 사회와 교회 생활의 다양한 영역에서 더 완전하게 참여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과 기준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긴급한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 사제 허용은 배제했다. 그는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죄 중 하나는 (교회를) '남성화'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탈남성화'돼야 한다"며 "동시에 여성을 '남성화'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88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꾸준히 제기된 건강 이상설과 그에 따른 자진 퇴임설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나는 건강하다. 사실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늙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무릎과 허리 통증 탓에 휠체어에 자주 의존하는 그는 "교회는 다리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운영된다"고 잘라 말했다.
교황은 2021년 7월 4일 결장 협착증 수술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2023년 6월에는 탈장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수술받았다. 또한 최근 2년 동안 여러 차례 독감에 걸리는 등 병치레가 잦았다.
그는 "교황이 아플 때마다 콘클라베가 열릴 것 같은 느낌이 항상 든다"며 "하지만 수술받는 동안에도 나는 사임을 생각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교황의 자서전 '희망'은 애초 교황의 사후에 출간될 예정이었지만 교황이 25년마다 돌아오는 올해 희년에 맞춰 출간을 앞당겼다.
공동 저자로 참여한 이탈리아의 출판업자 카를로 무소는 지난 6년 동안 이 책을 공동 집필해왔다고 밝혔다.
교황은 303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란 자신의 성장 과정, 아르헨티나 주교로서의 생활, 그리고 전 세계 교회의 지도자로서 내린 결정에 대해 되돌아본다.
역대 교황 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취임 이후 성소수자(LGBTQ)를 포용하는 태도를 취했고, 지난해 동성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공식 승인하기도 했다.
교황은 "축복받는 건 관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며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은 축복받을 수 있다. 이혼한 사람,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축복받을 수 있다.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라 인간의 한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2024년 9월 동티모르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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