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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강성곤의 아름다운 우리말…세련되고 올바른 표현-②
기사 작성일 : 2025-01-15 17:00:30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강성곤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본인 제공

◇ 서너 개

우리말 수(數)읽기에서 '서:/너:'(석:/넉:)의 존재는 특별하다.

3∼4의 경우, 특정 단위 앞에서는 '세네' 대신 '서너/석넉'을 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발음 지향과 관련이 있다. 영어에서도 정관사 the가 a,e,i,o,u 등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서는 더[ð'ㅓ']가 아닌 디[ði]로 소리 나지 않던가. 비슷한 이치다.

다음 예문들을 보면 '서', '너', '서너'가 '세', '네', '세네'로 읽는 것보다 나음을 알 수 있다.

'종이 석 장만 갖고 와'

'넉 달 만에 그 일을 해냈다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서푼짜리 오페라'

'고기 석 점에 벌써 배가 불러?'

'그림을 석 점이나 얻어 오다니 매를 넉 대나 맞았어?'

'서너 달 지나면 가을이야'

'오토바이 서너 대가 지나갔어'

◇ -은, -는/, -이, -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김훈 작가가 '칼의 노래'의 서두에서 둘 중 어느 문장을 쓸까? 며칠을 고민했다 한다. 우리 말글의 맛과 멋, 뉘앙스는 이리도 작은 것에 미묘하게 달라진다.

'-은, -는'과 '-이, -가'는 무엇이 다른가.

우선 '-이, -가'는 주격조사다. '-은, -는'은 보조사다. 여기에 약간의 힌트가 있다. '-이, -가'는 문법적인 구실을 하는 당당함이 있는 품사이고, '-은, -는'은 기능과 뜻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대충 얼개가 잡힐 것이다.

'-이, -가'의 사용

① 주어가 관심의 초점일 때 쓴다.

'영희가 1등이야'

당연히 영희에 힘이 실린다. 그래서 주격조사 '가'가 오롯이 빛난다.

② 새로운 정보를 제시할 때 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어떤 공주가 살고 있었다'

③ 텍스트가 묘사문(객관적 서술)일 때 쓴다.

'대통령이 영령들의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은, -는'의 사용

① 서로 비교할 때 쓴다.

'철수는 사과를 좋아하고, 미혜는 배를 좋아해'

여기서 '-은, -는'은 주어를 대비시켜 의미를 또렷하게 하는 보조사 역할에 충실하다.

② 이야기를 이끌 때 쓴다.

'강원도는 자연이 훌륭하다 | 손흥민은 인기가 대단하다'

'강원도는'의 '는'을 통해 자연이라는 주제를 끌어내고, '손흥민은'의 '은'이 마찬가지로 인기라는 토픽을 이끈다.

'-은, -는'은 이렇듯 이야기를 끌어내는 기능을 갖는다.

'-은, -는'은 '문장주제어'라고도 한다. 영어와 기본적으로 가장 차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어식 문장 구성으로는 '강원도는 자연이라는 면에서 훌륭하다'가 된다.

③ 서술어에 방점이 찍힐 때 쓴다.

'명호는 우리 팀 에이스야!'

'에이스'에 무게중심이 있다. 곧 서술어 영역에 관심이 모일 때, '-은, -는'이 앞에 자리한다.

◇ 이곳은요

"제가 지금 나와 있는 이곳은요, 쇳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전형적인 서툰 표현이다.

TV라면 동작과 시선을 동반하면서 "쇳물이 나오는 뜨거운 현장입니다."라고 해야 바람직하다.

라디오 같으면 "소리 들리시나요? 쇳물이 나오는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라고 해야 현장감을 살린 멘트다.

'제가', '지금', '이곳' 등 방송에서 특히 많이 나오는 이런 표현은 군더더기 말인 데다 설명조여서 서툴고 둔감한 인상을 준다.

지시대명사가 남발되는 길고 불필요한 멘트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생동감을 갉아먹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이곳은요"는 문법에도 안 맞는다.

보조사 '-요'는 주격조사 '이/가'나 보조사 '은/는'에 연이어 올 수 없다. 구어(입말)의 자연스러움을 호소하곤 하지만, '-요'를 붙이면 오히려 치기(稚氣)만 보탤 뿐이며 없는 것이 훨씬 산뜻하다.

'이것', '저것', '요것' 등의 지시대명사는 말에 힘을 빼놓는다.

방송은 현장성이 중요하다. '다시 보기'와 '몰아보기'가 왕성한 방송은 현장성이 중요하다.

'다시 보기'와 '몰아보기'가 왕성한 세상이지만 방송은 어디까지나 전파 이용을 통한 일회성이 본질이다. 지시대명사의 남발보다는 다양한 표현으로 승부해야 한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전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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