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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in제주] '6월의 입춘굿'…일제가 찍은 탐라국입춘굿 사진 12장
기사 작성일 : 2025-02-02 07:01:11

탐라의 '낭쉐 몰이' 재연


(제주= 제주목 관아에서 탐라국 입춘굿이 열린 가운데 고대 탐라의 왕이 나무로 만든 소인 '낭쉐'를 몰아 밭을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친경적전'(親耕籍田)이 재연되고 있다. [ 자료사진]

(제주= 변지철 기자 = 을사년 봄의 시작을 알리는 탐라국입춘굿이 입춘(2월 3일)을 하루 앞둔 2일 제주 원도심에 있는 제주목 관아 일원에서 개막했다.

한 해의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주 입춘굿은 탐라국 시대부터 이어온 새봄 맞이 풍농굿이다.

하지만 입춘굿이 오랜 세월 명맥을 이어오다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 옛 입춘굿 사진은 일제에 의해 연출된 것

국립중앙박물관은 1910년대 관덕정 앞마당에서 펼쳐진 입춘굿놀이 모습을 담은 유일한 사진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들 사진 12장에는 많은 제주도민이 관덕정 앞에 모여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들이 펼치는 입춘굿놀이를 구경하는 모습이 담겼다.

탈을 쓴 심방들이 춤을 추고 사설을 읊으며 흥을 돋우고, 어른과 아이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서서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다.

사진만 얼핏 보면 입춘을 맞아 입춘굿이 성대하게 펼쳐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제주 입춘굿은 탐라국의 왕이 풍년을 기원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농업을 장려하던 친경적전(親耕籍田) 의식에서 비롯된 새봄 맞이 풍농굿이다.


관덕정 마당에서 펼쳐진 입춘굿놀이


(제주= 1914년 6월 관덕정 앞마당에서 펼쳐진 입춘굿놀이 모습. 2025.2.2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사진 이면에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사진 왼쪽 상단에 세로로 쓰인 '大正三, 六, 六, 濟州'란 글귀다.

이는 '대정 3년 6월 6일 제주'를 뜻하며 사진을 촬영한 날짜와 장소를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때까지 융희(隆熙)란 연호를 사용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잃은 뒤로 일본 연호인 명치(明治), 대정(大正), 소화(昭和)를 사용했다.

사진이 일제강점기인 1914년(대정 3년) 6월 6일 촬영됐음을 뜻한다.

24절기 중 첫째 절기인 입춘은 보통 양력 2월 초인데, 입춘굿놀이 사진이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6월에 촬영됐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입춘날 펼쳐진 입춘굿놀이가 아닌 이를 재연한 연출된 사진으로,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촬영된 것이었다.

그가 쓴 자서전 '어느 노학도의 수기'(ある老.徒の手記, 아사히신문사, 1953)를 보면, 자신이 제주도에 도착한 지 20일째 되던 날 관덕정 광장에 관민 남녀노소들을 모이게 하고 '제주도 입춘 풍속'을 재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리이 류조 자서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어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제주도의 경우, 남해안 다른 지방과 다른 독특한 풍습이 있다. 예를 들어 (중략) 또 남녀가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제의를 행하는 풍습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 제의는 나를 위해 개최하여 보여주기도 했다. 제주도 신의 내력을 담은 신화 등 이 모든 것에 옛 탐라왕국의 그림자(面影)가 드리워진 듯했다."

당시 사진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주도민과 심방들이 자신을 위해 동원됐다고 자랑삼아 쓰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군중들 사이에 일본 순사의 모습도 보이고 제주도민의 표정 역시 축제장에 있다기엔 무언가 어색하고 경직돼 있다.

공연을 마친 뒤 촬영한 심방들의 단체 사진은 남녀 심방들이 정면으로 서 있거나 옆으로 또는 뒤로 돌아선 채 찍혀 있다.

기념촬영이라기보다 그들의 복장 등을 기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한 일본 인류학자의 제주 지역 문화·역사 조사 과정에 일본 순사에 의해 제주도민이 동원된 이유는 무엇일까.


도리이 류조가 촬영한 제주 남녀 심방들


(제주= 1914년 6월 관덕정 앞마당에서 입춘굿놀이에 참여한 남녀 심방들의 단체사진 모습. 2025.2.2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일제 문화말살정책으로 사라졌다 다시 복원

단초는 탐라건국신화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에 탐라의 시조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일본에서 도래해 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려 말∼조선 전기에 편찬된 제주 향토지인 '영주지'(瀛洲志)에는 고려사와 달리 삼신인의 배우자인 삼공주가 벽랑국(碧浪國) 출신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영주지가 아닌 고려사 기록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고려사 기록을 토대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은 동일하다)을 주장하며 조선 침략과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일선동조론 사관을 주창했던 도리이 류조는 조선총독부 지휘 아래 한반도 조사차 1914년 5월 17일 제주에 도착했다.

도리이 류조를 포함한 연구진들이 바로 찾아간 곳은 탐라건국신화의 유적지인 '삼성혈'(三姓穴, 모흥혈)과 '삼사석'(三射石)이었다.

삼성혈은 삼신인이 나온 탐라국 발상지이고, 삼사석은 삼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삼신인이 각자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쏜 화살이 꽂혔던 돌들이다.


삼성혈 입구를 밟고 선 일본 순사들


(제주= 1914년 5월 제주를 찾은 도리이 류조가 찍은 삼성혈(모흥혈)의 모습. 탐라건국신화의 유적지인 신성한 삼성혈 입구를 일본 순사들이 밟고 서 있다. 2025.2.2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도리이 류조는 이들 유적을 조사해 제주의 토착문화와 융합한 일본문화의 전파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이들이 찍은 사진 중에는 의도적으로 일본 순사들에게 3개의 삼성혈 입구를 밟고 서 있도록 한 모습 등이 담겨 있다.

'혈'의 깊이와 너비를 측정하려는 것인지 의도는 알 수 없으나 한 민족의 건국 신화 유적지를 함부로 밟고 선 모습에서 타민족의 역사·문화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연구진은 이어 6월 6일 관덕정 앞마당에서 고대 탐라국으로부터 이어져 온 입춘의례를 제주도민들을 동원해 시연케 했다.

이것이 새봄이 드는 입춘이 아닌 초여름에 입춘굿놀이가 펼쳐진 이유다.

그리고 12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일본은 이후 이러한 내용을 사진엽서 등으로 남겨 그들의 식민 통치 정당성과 정책을 선전했다.

또 한편으론 입춘의례 사진을 '제주도 기생들의 춤'이란 제목의 엽서로 발행해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이후 효용가치가 떨어진 탐라국 입춘굿은 결국 1925년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완전히 맥이 끊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해방 이후 입춘굿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가 조금씩 이뤄졌다.


탐라 입춘 굿 놀이


[ 자료사진]

1960년대부터 주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또는 탐라문화제의 전신인 한라문화제 등에 출전하는 작품 형식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 조선시대 '탐라록'(耽羅錄) 기록과 과거 입춘굿에 참가했던 심방들의 고증 등 여러 기록을 토대로 복원을 위한 연구가 진행됐다.

물론 일제가 남긴 12장의 유일한 기록 사진 역시 복원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현이 이뤄진 것은 1999년부터다.

그해 2월 제주시가 주최하고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회 제주도지회가 주관한 탐라국 입춘굿놀이가 74년 만에 열렸다.

맥이 끊겨 대회나 행사 때 단편적으로 공연됐던 입춘굿이 입춘을 맞아 관덕정 광장에서 원형에 가깝게 대규모로 재현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입춘굿은 그 후 새봄을 맞이하는 제주의 축제로서 현재까지 20년 넘게 맥을 이어오고 있다.

연구자들은 "일본국 도래설 혹은 벽랑국 도래설은 좀 더 면밀한 학술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며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탐라사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일제강점기 관덕정 앞마당에서 행해진 입춘굿 모습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흑백 사진은 매우 슬프고 애통한 역사적 한 장면"이라며 "그동안 이 사진을 촬영 주체와 목적에 대한 정확한 설명 없이 무분별하게 활용한 면이 없지 않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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