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기자회견장에 들어서는 미-이스라엘 정상
(워싱턴DC AFP=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가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마치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2025.2.4
황철환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골적 친이스라엘 행보에 미국의 중동 내 영향력이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관측된다.
역대 행정부가 수십년간 고수해 온 '중동의 정직한 중재자'(honest broker) 이미지가 훼손될 가능성이 크고 중동 내 반미정서를 넘어 우방들과의 신뢰관계에까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후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주변 제3국에 영구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기간 관리·개발한다는 구상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가자지구를 소유할 것"이라는 발언까지 내놓았다.
◇ 미국이 이스라엘 극우 '약속의 땅' 숙원 풀어주나
중동에서는 주민들을 제3국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의 소유권을 갖는다는 구상은 일단 이스라엘 극우진영의 숙원을 대신 이뤄주는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크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극우세력에게는 성서에서 차지하라고 기록된 '약속의 땅'으로 통한다.
네타냐후 총리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극우진영도 가자지구 전쟁 때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고 재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에 강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으나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의 욕심을 계속 경계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양대 자치구를 이루는 요르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할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도 몇주 안에 관련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에 노골적으로 친화적인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이날 더 선명해지자 중동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활동가
(워싱턴DC AFP= 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정상회담이 진행된 워싱턴DC 백악관 인근에서 자유의 여신상 분장을 한 활동가가 네타냐후 총리를 체포할 것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5.2.4
아랍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즉각 성명을 내고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이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5개국은 지난 1일 외교장관 공동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반응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통치하는 미국에 대한 신뢰 약화가 강하게 반영돼있다.
과거 미국 행정부는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을 통해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위한 보편적 접근법으로 굳혀왔다.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를 통해 서로 주권을 지닌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가자지구 주민 강제이주와 재점령 계획은 아랍권과 유대인의 공존을 표방하는 중동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미국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온정적인 여론과 대규모 난민 유입 같은 현실적 우려도 주변국들의 반미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실제 요르단은 과거 중동전쟁 여파로 자국에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왕가 축출과 국왕 암살 등을 시도해 내전을 치른 경험이 있고, 이어 레바논에서도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이 내전의 배경 중 하나가 됐다.
◇ 팔레스타인 지원 삭감…이스라엘엔 민간 살상무기 공급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이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서 탈퇴할 것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UNRWA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1차 중동전쟁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 70만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다.
이스라엘은 UNRWA 직원 일부가 재작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에 관여했다는 등의 의혹을 제기하며 최근 UNRWA를 테러단체로 지정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조치는 이스라엘이 그간 눈엣가시로 보던 유엔 기구가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위기를 맞게 했다는 점에서 또하나의 편들기로 평가된다.
휴전이 발효되자 가자지구 북부의 집으로 돌아가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UPI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트럼프 행정부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 의회 지도부에 10억 달러(약 1조4천500억원) 규모 무기의 이스라엘 이전에 대한 승인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중에는 가자 전쟁에서 무려 4만7천500여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숨지는 등 민간인 피해가 컸던 원인으로 꼽히는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에 쓰일 수 있는 1천 파운드(약 453㎏)짜리 항공폭탄 4천700발이 포함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 폭격에 따른 가자지구 내 민간인 참변 때문에 고위력 폭탄의 공급을 일부 제한한 바 있다.
가자지구에서 2023년 10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스라엘 폭격에 사망한 이들은 4만7천명 정도다.
사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 비중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네타냐후 총리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쟁범죄 혐의로 수배된 상태다.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이권까지 챙기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미국의 소프트파워 훼손'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중동은 각종 종교, 종파, 민족이 충돌하는 '세계의 화약고'다.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미국은 적어도 외견상 중립을 표방해 소프트파워까지 유지하며 갈등을 관리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 앞에서 미국이 앞으로도 그런 노력을 통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오른 국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