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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소등섬 일출[사진/임헌정 기자]
(장흥= 현경숙 기자 =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 한강 작가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말이 '한승원의 딸'이었다.
그만큼 한승원은 한국 현대 문학에서 큰 산이었다.
한승원 선생은 이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아버지로 더 유명해졌다.
◇ '한승원의 딸' 한강·'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서점에 가면 한강의 작품 옆에 한승원 선생의 시와 소설이 나란히 배치돼 있고, 선생의 저작도 한강의 작품과 함께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문학 자산이 풍부하고 커진 것을 보여주는 흐뭇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이만큼 큰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은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다.
국문학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선생은 수상자가 딸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한국 문학이 국제적으로 큰 상을 받았다는 데 누구보다 기뻐했을 듯하다.
한승원은 "작가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한강은 부친이 이룬 문학적 자산 속에서 태어났지만, 대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한강은 대표작 '소년이 온다'의 집필이 압도하는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힌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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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만 앞바다[사진/임헌정 기자]
한승원은 1939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96년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간 뒤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머물며 한시도 글쓰기를 멈춘 적 없다.
등단작인 단편소설 '목선'(1968) 이후 '아제아제 바라아제' '다산' '불의 딸' '원효' 등 소설과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등 시집, '한승원 글쓰기 비법 108가지' '한승원의 소설 쓰는 법' 등 100권가량의 책을 냈다.
선생은 80대 중반인 지금도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고, 글을 쓰는 한 살아있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그의 호는 '해산'(海山)이다.
해산은 바닷가에 서 있는 산이 아니다. 대양의 밑바닥에서 원뿔 모양으로 1천m 이상 솟은 봉우리를 지질학에서는 해산이라고 일컫는다.
해산은 보이지 않지만 높다. 그는 유튜브 강의에도 열심인 노장이다.
2년 전 시작한 유튜브 강의 '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는 최근 116강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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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집필실 '해산토굴'[사진/임헌정 기자]
◇ 한승원 문학길
장흥에는 한승원 산책길, 소설길 등 그의 작품 세계를 곱씹으며 걸을 수 있는 길과 공원이 있다.
한승원의 집필실, 살림집, 생가와 가까워 한승원·한강 부녀가 함께 산책했을 법한 장소들이다.
실제로 한승원 산책로 옆에 있는 카페에는 한강이 앉았던 자리가 표시돼 있었다.
이 길에 서면 한국의 바다 중에서 가장 비옥하다는 득량만이 펼쳐진다.
이 길들은 동해, 남해, 서해 바닷가를 따라 걷는 코리아둘레길인 해파랑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중 남파랑길 78∼80코스와 만나기도 한다.
한승원 산책길은 장흥군 안양면 율산 마을에 있는 선생의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가깝다.
산책길과 토굴에는 방문객이 적지 않다.
스님이 수도하는 작은 도량을 흔히 토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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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문학학교 '달 긷는 집'[사진/임헌정 기자]
해산토굴에서 300∼400m 떨어진 살림집과 집필실을 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오가며 글쓰기를 쉬지 않는 데서 '글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구도하듯 글을 쓰는 선생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이 팔순 넘어 출간한 책만도 장편 '신화의 늪', 시집 '꽃에 씌어 산다', 자서전 '산돌 키우기',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재출간) 등 여럿이다.
해산토굴 곁에 한승원문학학교인 '달 긷는 집'이 있다. '달'은 진리와 예술을 뜻한다.
선생을 만나거나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곳인 이 학교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 이후 선생과 한강을 기리는 작은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득량만에 뜬 달을 본다는 '견월정' 정자가 학교 옆에 서 있다.
율산 마을 앞 여다지 해변에 조성된 한승원 산책길은 1㎞가 채 안 되는 짧은 길이지만 선생의 시비가 30기나 서 있는, '시가 있는 산책로'이다.
'바다에서 낙지, 주꾸미, 바지락, 키조개를 캐며 사는 마을 사람들의 희망과, 해와 달과 별과 불어오는 바람과 춤추는 파도와 찾아오는 물새와 방긋 웃는 꽃과 안개와 이슬들을 무지갯살처럼 피어올린'(산책로 조성 기념 비문에서 발췌) 작품들이다.
선생의 시 '새벽달'도 시비에 새겨진 작품 중 하나이다.
새벽달
바다 쪽 유리창 밖으로
모가지에 금가루 장식하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학 같은 득량섬
키조개 캐는 배와 바지락 파는 아낙들
해류와 달과 별 휘도는 것 내다보는
그 재미 하나 보고 토굴에 사는 자네
외롭지 않은가 하고
스페인 싸움소의 뿔 같은 새벽달이 물었다
어둠 속 떠도는 혼령 같은 내가 말했다
슬픈 사유 한 과 한 과
진창같이 질퍼덕거리는 길바닥에 깔고
영생할 무덤집 열심히 도배하는
살과 뼈 속에는 외로움 기생할 틈바구니가 없네
청년 시절 학업을 잇지 못하고 득량만 바다에서 고기 잡고, 김 채취하며 집안 생계를 도왔던 선생에게 바다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자 작품을 긷는 영감의 샘이다.
선생은 '내 소설의 8할은 고향의 바닷바람이 낳은 것'이라고 털어놓곤 한다.
득량만은 '식량을 얻는다'는 뜻의 이름처럼 수산물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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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만 일몰[사진/임헌정 기자]
이곳 바다와 갯벌에서 나는 세발낙지, 키조개, 바지락, 무산 김은 국내 최고의 맛과 품질을 인정받는다.
무산 김은 유기산 처리를 하지 않고 양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흥 회진면 신덕마을에는 선생의 생가가 있다. 생가와 회령진성을 잇는 길은 한승원소설문학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선생이 학창 시절 걸어 다녔던 길로 약 7㎞이다.
회령진성에서 시작하면 한재공원, 생가를 지나 신상방파제에 자리한 '해산 한승원의 문학현장비'까지 이어진다.
회령진성은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1597) 때 일본군에 참패한 조선 수군의 배 12척을 인계받아 수리했던 곳이다.
불굴의 용기와 의지에 차 '신에게 아직 배 12척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 바다 위를 떠도는 듯했다.
이순신은 수리한 배들을 명량해전에 투입해 대승을 거두고 전황을 승리 쪽으로 되돌린다.
한재공원에는 국내 최대 할미꽃 단지가 조성돼 있다.
한승원 문학현장비가 세워진 방파제 앞 바다는 그가 젊었을 때 부친을 도와 고기잡이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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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문학 산책길[사진/임헌정 기자]
◇ 노벨문학도시·문학 기행 1번지…장흥
장흥은 현대문학의 거장과 문인이 대거 배출되고, 곳곳이 소설과 시의 배경이 된 고을이다.
'문학 성지'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한강을 키워낸 한승원의 문학을 있게 한 장흥은 이제 노벨문학도시가 됐다.
한승원 외 이청준, 송기숙, 이승우 등 현대 한국문학의 큰 별들이 장흥 출신이다.
위선환, 김영남, 이대흠, 이성관, 이한성, 박순길 등은 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한승원과 동갑으로,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선학동 나그네'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이청준은 작품이 외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된 한국 작가에 속한다.
분단 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되는 송기숙은 장편소설 '자랏골의 비가' '암태도' '녹두장군', '오월의 미소' 등을 간행했다.
이승우는 '에리직톤의 초상' '생의 이면' 등 장편소설 17편, '심인 광고' '마음의 부력' 등 소설집 14권을 펴냈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승우는 몇 해 전 노벨상 수상 유력 작가로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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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문학탐방로[사진/임헌정 기자]
김상찬 장흥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은 장흥 출신 등단 작가는 200명이 넘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현역 작가는 50명 이상이라고 전했다.
천관산,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 가지산, 탐진강, 득량만 등 장흥의 명산과 푸른 바다, 그윽한 자연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장흥은 경복궁의 정 남쪽 땅끝, 즉 정남진이다. 장흥 사람들은 남북통일의 위업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여긴다.
2008년 국내 최초로 지정된 '문학관광기행특구'답게 장흥에는 한승원 길 말고도 이청준 길, 이승우 길 등 문학 명소가 많다.
이청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중편 소설 '눈길'의 배경이 된 그의 생가와 야산에도 도보여행 길이 '눈길'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돼 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절망 속에서도 자식을 향해 무한한 사랑을 간직한 모정을 그린 소설 속에서 모자가 함께 걷는 눈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격찬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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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문학산책길 앞 여다지 해변 갯벌[사진/임헌정 기자]
문학작품의 배경과 소재가 됐던 장흥 곳곳은 영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청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축제' 촬영지인 남포마을과 그 앞바다의 소등섬은 일출 명소이다.
을사년 새해에도 무인도인 소등섬에는 멋진 일출 장면을 포착하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기사는 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