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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국가산단] ① 반세기 고도성장 이끌었지만…생산 '뚝'·연령 '쑥
기사 작성일 : 2025-02-09 07:00:36

[※ 편집자 주 =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의 발전을 이끌던 산업단지가 시대의 변화에 밀려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한때 경제 성장의 한가운데에서 맹활약했지만,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과거의 활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활과 쇠락의 기로에 서 있는 각 지역 산업단지들을 둘러보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으며 부활을 위해 어떠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할지를 모색하는 기획기사 3편을 일괄 송고합니다.]


여수국가산단 야경


[여수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국종합=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고도성장을 견인하던 국가산업단지가 제조업 불황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국가산단이 활력을 잃어가면서 한국판 '러스트 벨트'(rust belt·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가 출범하면서 미국 공업지대가 부흥을 꿈꾸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이뤄 더 부각되고 있다.

일부 국가산단은 전성기와 비교해 생산 실적과 수출 지표가 '반 토막' 나는가 하면, 청년층의 제조업 기피 현상으로 노동자 고령화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여파는 국가산단 주변 지역의 경제 상황과 직결되면서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 같은 위기를 유발하고 있다.

◇ '황금기' 지난 국가산단, 생산·수출 고전


구미국가산업단지


[구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경북 구미 1∼4국가산단은 2013년 최고 전성기를 누린 이후 10년 넘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구미산단의 최고 수출실적은 2013년 329억9천800만 달러였다. 하지만 정확히 10년 후 구미산단의 수출 실적은 181억2천100만 달러로 곤두박질쳤다.

대기업이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지역에 있던 생산라인을 해외나 국내 다른 지역으로 속속 옮기면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전북 군산국가산단 역시 한때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와 한국GM 군산공장을 중심으로 전북 전체 수출액의 43%까지 점유하며 지역경제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현재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하고, 2018년 한국GM 군산공장이 폐쇄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탓이다.

이후 군산형 일자리사업 주체인 명신이 한국GM 군산공장을 인수하며 군산산단 부활을 도모했지만, 명신마저 최근 경영난에 빠지면서 회복세가 주춤하는 모양새다.

군산 국가산단은 전성기인 2011년에 생산 실적 9조9천799억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최저치였던 2020년의 5조1천825억원과 비교하면 두 배 수준이다.


폐쇄된 한국GM 군산공장


[ 자료사진]

1967년부터 조성된 여수국가산단도 석유화학단지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며 반세기 동안 국가 기간산업의 본산으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중국과 경쟁 격화, 원자재 가격 상승, 원료 수입 의존 심화 등 위기가 이어지면서 장기 침체의 늪에 빠졌다.

전체 생산 실적은 2022년 101조7천100억여원에서 2023년 85조3천200억여원으로 16.1% 줄었다. 같은 기간 수출실적도 388억7천400만 달러에서 322억4천100만 달러로 17.1% 감소했다.

여수산단은 국내 최대 석유화학 산단이지만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의 공장 가동률은 작년 3분기까지 평균 80%를 넘지 못했다. 롯데케미칼은 여수 2공장, LG화학은 여수 SM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LG화학(석유화학본부),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금호석유화학 등 주요 4개사는 일제히 적자를 기록했다.

경남 창원국가산단은 다른 국가산단만큼은 아니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산이 주춤하고 수출이 하락세로 접어드는 등 쇠락 징후를 보인다.

1974년 태동한 창원국가산단은 기계공업의 요람으로 2000년대까지 비약적 성장을 일구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창원국가산단 생산 규모는 2011년 50조원을 돌파(55조4천49억원)한 이후 49조원과 58조원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다.

2023년에는 방산업계 호황 등에 힘입어 사상 첫 생산 60조원을 넘기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상승 기조가 앞으로도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수출의 경우 2011년과 2012년 각각 233억7천100만 달러와 239억6천700만 달러를 기록해 사실상 정점을 찍은 뒤 줄곧 하락세를 겪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2019년에는 수출 실적이 95억9천700만 달러로 쪼그라들었고, 최근까지도 전성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 인구 줄고 노동자는 노령화…늪에 빠진 국가산단


창원국가산단


[창원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경력이 1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현장에서 막내입니다."

창원국가산단의 한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30대 박모씨는 와 인터뷰에서 노동자 고령화의 심각성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박씨는 2000년대 후반 경남 창원 소재 대학에 입학한 직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창원에는 국가산단이 있으니 산단이 없는 곳보다는 취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실제 박씨는 대학 1학년이던 2008년 창원국가산단 내 한 제조업체에 비정규 생산직으로 입사하는 데 성공했고, 2012년에는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입사 초기만 해도 국가산단으로 출근한다는 자부심이 넘쳤지만, 지금은 씁쓸한 마음이 더 크다.

창원국가산단이 직면한 위기는 산단 기반 시설 노후화, 수도권 집중 현상과 제조업 기피 현상 등에 의한 청년 근로자 이탈, 글로벌 산업환경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박씨는 "새로 들어오는 청년의 비율이 낮고 그만큼 노령화가 진행되니 아무래도 활력이 떨어지는 걸 실감하고 있다"며 "미래가 불투명하니 주변에 창원산단으로 오라고 추천할 자신도 없다"고 말했다.

청년층의 국가산단 기피현상은 지역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구미시 등에 따르면 구미시 인구는 2015년 42만명에서 지난달 40만4천명으로 줄며 간신히 인구 40만명대를 사수하고 있다. 평균 연령은 그 사이 35.6세에서 42세로 올라갔다.

전국 플랜트건설노조 여수지부에 따르면 신·증설, 정비에 참여하는 플랜트 건설 기능공 일자리는 지난해 월평균 1만명 수준이었지만, 지난 1월에는 2천명에 불과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제조 비중이 줄면서 채용 인원이 감소했다"며 "전체 직원이 10년 전에 비해 2천∼3천명 줄었고, 평균 연령도 26세에서 39세로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구미 국가산단 인근 상가


[촬영 황수빈]

인구감소는 국가산단 인근 상권과 지역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취재진이 찾은 지역 국가산단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과 달리 적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한적했다.

구미국가산단 3단지 인근 상가에는 문을 연 식당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상가 건물에는 '12개월 무상 임대', '최대한 절충' 등 임대 홍보물만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건물 전체가 텅 비어있거나 1∼2곳만 장사를 하는 곳도 심심찮게 보였다.

17년간 식당을 운영한 함윤선(72)씨는 "LG랑 삼성이 다른 지역에 가기 전만 해도 장사가 진짜 잘돼서 돈을 쓸어 담았다"며 "2014년부터 주춤주춤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손님이 아예 끊겼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5년 차 공인중개사 이양노(72)씨는 "지금이 IMF,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 원룸 보러오는 직장인들이 없어서 공인중개사무소가 문 닫는 판"이라며 이미 폐업한 옆 부동산을 가리켰다.

1990년대 초 창원국가산단 인근 상가에 식당을 개업해 30년 넘게 운영하는 허모씨도 창원국가산단의 위상 변화를 실감한다고 했다.

허씨는 "개업 초창기에는 점심시간이면 작업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줄을 섰었지만, 지금은 전혀 없다"며 "이제는 작업복을 입었더라도 40∼60대이고, 젊은 사람 찾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김인유 손상원 김선경 황수빈 김진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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